퇴사 D-14 업체 사람들에게 소식 알리기
2020. 02. 14 의 기록
1.
퇴사일을 확정하고 팀원들에게 말하고나니 정말 퇴사가 실감이 났다.
하루종일 밀려있던 지출결의서 결재를 전부 해치웠다.
확인, 결재.
확인, 수정 필요, 보류.
꼼꼼함을 요구하는 반복적인 업무 사이로 잡념이 비집고 들어왔다.
거래처 사람들에게 말을 해야해.
이미 많이 편해진 사람들, 업무적으로 많이 도움 받은 사람들, 지금 이 순간도 나에게 업무 대화를 보내오는 사람들.
모두 내가 회사를 버틸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들이다.
제일 친하다고 생각한 사람한테 먼저 말했다. 이전에 내 담당자였지만 이직과 업무 변동으로 이제는 일로 엮일 일 없는, 친분으로만 연락하는 사람이다.
이직하는거냐고, 묻는다.
아니라고 했다.
쉬는거냐고, 묻는다.
다른 일을 해보려고 한다 말했다.
자세히 묻기가 조심스러워하는게 느껴진다.
이 업계 괜찮은데, 무슨 일 하고 싶은거냐고, 묻는다.
갑자기 내 속에서 작지만 강력한 무언가 훅 올라왔다.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이 이러이러한건데 나는 이걸 정말 하고 싶고, 충분히 고민했고, 나름의 계획을 짜고 나가는거다' 라며 방언을 터뜨릴 뻔했다.
결국 나중에 자리 잡으면 말씀드리겠다며 끝내 말하지 않았다.
나는 무서웠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한다고 사람들에게 말했을 때 쏟아질지도 모를 훈계와 걱정과 냉담이.
그 반응들에 내가 흔들릴까봐 무서웠다.
이제와서 무를 수도 없는 일이다.
업체 사람들과 통화를 할 때마다 나의 퇴사를 알렸다. 다들 어디로 가시냐고 묻는다(아, 결혼하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이건 좀 웃기고 씁쓸했다).
사실 업계 내의 이직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아직 구한데는 없다고 하니 회사를 소개해 주려는 분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고 단단한 세계에서 '저 이제 00 안하려구요'라는 말이 얼마나 쌩뚱맞게 들릴까. 나조차도 정말 여기를 영영 떠날 자신이 없어서, 나 여기 뜬다, 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다.
2.
나에게 회사를 소개해주려고 했던 분은, 퇴사 소식을 듣고 퇴근 길에 우리 사무실에 들렀다. 내가 담당한 업체도 아니었는데, 술자리에서 친해진 분이었다.
우리의 역사가 깊지 않다고 생각할 것 같았는데 솔직히 조금 놀랐고, 사실은 너무 고마웠다.
그러면서도 티를 낼 수가 없었다.
나는 2년 내내 업계를 떠날 생각으로 다니면서, 업계 사람들과 친해져도 언젠간 멀어질 사람들이라고 다짐하며 다녔다.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업계에서 매출이 꽤 좋은 회사이고, 내가 만나는 업체 사람들은 실적으로 맺어진 관계이기 때문에 나 자신으로서가 아닌, 내가 이 회사 직원이라서 친해질 수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속 없이 그냥 '나'가 된 앞으로는, 더군다나 업계를 떠날 생각인 '나'는 사람들에게 더이상 시간과 정성을 쓸 이유가 없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우리는 진심으로 즐거웠고, 친했다. 때로는 얄팍하게나마 의리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모두 각자가 어디어디에 속한 누구라는게 전제되어야 하는 것일 뿐. 이게 자본주의의 원리겠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거야.
그렇게 머릿속으로는 깔끔하게 인정하는 듯 하면서도, 한때는 웃고 즐거웠던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는게 두렵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내 퇴사 소식에 사무실에 들러 이직 자리를 같이 고민해주는 이 사람의 호의에도 순전히 감동할 수만은 없다. 내가 업계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는 걸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두렵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야할까.
어느 정도 자세하고, 어느 정도 단호하고, 어느 정도 여지를 남기며 떠나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