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D-10 인수인계
2020. 2. 18 새벽의 기록
회사에 다닐 때, 너무 잦은 업무 변동과 설익은 결정권 부여가 스트레스였다.
처음으로 담당했던 업체를 후임에게 인수인계 할 때
처음 시도하는 제품군 런칭을 맡았을 때
전 제품의 원가를 관리하고 자료를 만들 때
2년차 주제에 결재라인에 들어가서 승인과 반려를 결정해야 할 때
지금 생각하면 회사에서 그만큼 나를 인정하고 믿어준다는 말이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모두가 고정된 업무 속에서 자신의 실무능력을 쌓아가고 있을 때
나 혼자만 이리 옮겨지고 저리 옮겨지는 바람에 깊이 없는 잡경험만 쌓고있다는 불안함이 들었다.
중소기업의 특성상, 시간이 지날 수록 맨파워가 강해지는 건 나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든 나에게도 '나 아니면 할 사람이 없는' 업무가 2년 동안 꽤나 쌓였다.
자료를 정리하는데, 범위가 너무 많은 것이다.
진작 좀 정리해둘걸 - 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아니 이 사람들은 이것도 모르고 참 편하게도 일했네! 라며 라떼 is horse 같은 생각도 좀 하다가,
퇴사 직전에는 찬밥 되기 일쑤라던데, 그럼 대충 쓸거야 - 라는 비루한 경계를 하다가도,
결국엔 내가 나의 시간들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받는다.
이제는 손을 떼서 직접 진행하지 않던 업무도, 미처 정리할 틈이 없어 산발적으로 처리하던 업무도
이렇게 정리하니 나의 2년이 한 눈에 그려지는 기분이다.
(이를 잊지 않기 위해 매거진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https://brunch.co.kr/magazine/withoutfactory )
고작 2년의 시간을 정리하는 데도 이런 추억이 깃드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한 회사에서 보내다가 떠나는 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가는 걸까?
잘 따라와주는 팀원 한 명이 있다.
유독 나의 업무를 많이 받아가는 팀원이다.
어떻게 보면 나 때문에 업무가 늘어나는 것일 수도 있는데,
내가 갈 날이 얼마 안남았으니 하나라도 더 옆에서 보려고 하고, 직접 해보려고 하는 모습이 예쁘다.
차라리 함께 일했다면, 조금 덜 외로웠을까.
누군가와 같은 업무를 하고, 같은 시야에서 고민을 나누었다면
나는 그 연대 안에서 퇴사가 아닌 또 다른 해답을 찾을 수 있었을까.
나의 2년은
혼자서 일에 대해 고군분투하고, 혼자서 이 길은 아니라며 결론을 내린
조금은 외로운 길이었다.
(물론 나에게는 업무 외 시간을 채워준 좋은 동료들과 선임, 팀원들이 있었다.
하지만 같은 시야를 공유하는 사람이 부재한다면, 단지 즐거운 대화로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조금만 더 일찍 정리하고, 조금만 더 연대했으면 좋았을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 내 일을 받아가는 팀원들은 외로운 길을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이 막막하면 막막하다고, 나는 이렇게 혼자 동떨어지기 싫다고, 선임에게 말하고, 나누고, 연대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