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D-6 사직서
2020. 02. 21의 기록
1.
퇴사선언을 했을 때 내가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사람들은 생각보다 내가 퇴사 후에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이 퇴사가 정말 최선의 선택인지에 대해 깊게 물어보거나 논하지 않았다.
그건 나에게 다행이었다.
나는 언제나 다른 일을 하고 싶어했지만 그 일이 무엇이다, 에 대해서는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입사하고 얼마 되지않아 이 일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퇴사 후의 계획이 분명하지 않다면 하지 말라는 말, 일이 맞지 않아도 우선은 다니면서 준비하라는 말이 2년 동안 나를 붙잡고 있었다.
그렇게 20대의 마지막에 접어들었다.
2년 동안 하지 못한 걸 뒷자리가 9가 됐다고 해서 할 수 있을리 없다. 앞자리가 3으로 바뀐다고 할지라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그게 나니까.
그렇게 결국은 안 맞는다 생각하는 일을 억지로 하며 살게 될 나를 생각하니 끔찍했다.
아직은 다른 일을 해볼까, 지금이라도 전직해볼까라고 고민할 수 있는 나이라는 작은 희망으로 탈출을 꿈꾸기도 하지만, 언젠가 탈출의 여지마저 사라지는 날이 오면 나는 얼마나 큰 좌절과 막막함을 안고 살아야 하는걸까.
하지만 현실에는 회사를 다녀야 하는 무수한 이유들이 있었다.
적어도 한 두 달만 더 다녔어도 가족들에게 빌린 전세금은 다 갚고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나의 퇴사 시기가 한 달, 두 달 유예되는 것이 두려웠다.
처음에 1년만 채우고 나와야지-했던 마음은 그 당시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전팀장의 퇴사로 유예되었고,
결국 입사 1년 6개월만에 퇴사를 이야기 했다가 상여금이 나오는 추석까지는 버텨보기로 하고, 추석을 버텼으니 성과금이 나오는 연말로, 그렇다면 연봉 협상과 설 상여를 위해 2월까지는 다녀보자며 여기까지 왔다.
여기서 두 달을 더 다니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렇게 한 달만, 두 달만 더 회사를 다니는 것이, 퇴사를 결심하는 것 보다 쉬운 일이 될까봐 두려워졌다.
분명 내가 원하는 삶의 지향점은 바깥에 있는데, 이 곳에 머무는 것을 택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그렇게 퇴사를 결정했다.
2.
인사 담당자로부터 사직서를 올려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사직서 양식에는 '퇴직 사유'를 적는 란이 있었다.
퇴직 사유.
대표님과의 면담에서도, 그저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고만 말했다.
사실 나도 처음엔 이 회사에서의 미래를 꿈꾸기도 했었다.
하지만 입사하자마자 시작된 라인 세우기와 눈치싸움, 히스테릭한 전 팀장과 마음에 안드는 사람을 내치는 사람들, 거기에 찍힌 직원들의 줄퇴사.
한 때는 그런 회사와 직원들을 보며 불같이 화가 났던 적도 있다. 그리고 어리숙하게도, 이게 말이 되냐며 나의 불편함을 여과없이 드러내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음 속의 데드라인이 도래할 때까지 우걱우걱 회사를 다녔고,
그러는 사이 회사에 대한 분노도, 떠나보내진 사람들에 대한 불같은 공감도, 경영진에 대해 단죄하는 마음도 무뎌져갔다.
이제는 누군가 내게 회사를 떠나는 이유를 묻는다면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들다.
전 팀장이 너무 힘들게 해서?
사람을 너무 쉽게 포기하는 회사라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별로라서?
나와 일이 안맞아서?
모두가 맞는 말이면서도 조금씩은 부족하다.
2년 동안 많은 이유들이 쌓이고 쌓여서 퇴사를 해야겠다는 하나의 결론만 남겼을 뿐, 단 하나의 이유를 꼽을 수는 없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결국 대표님 앞에서도 그랬듯이, 모든 많은 말을 삼키고, 사직서에 이렇게 적는다.
퇴직 사유 : 일신 상의 사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