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D-8 관계 정리
2020. 02. 20 새벽의 기록
회사에 다니면서 적을 만들지 말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고, 나도 머리로는 잘 알지만, 2년 동안 사람과 부대끼는 일을 하면서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란(아니, 정확히 말해서 아무에게도 나쁜 사람이 되지 않기란) 쉽지 않았다.
매일 전쟁 치르듯이 함께 일을 쳐내던 거래처들은 결국 좋게 마무리되는 곳이 대부분이었지만, 오히려 '우리'라는 이름으로 지지고 볶던 회사 안에서 틀어져버린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었다.
전에는 남들이 다 알 정도로 친했지만, 이제는 남들도 다 아는 남남.
한 때는 자취방에서 먹고 자며 밤을 새울 정도로 가까웠지만 이젠 지나가다 마주치면 애써 지은 미소에 경련이 이는 사람.
그래도 전에는 서로 항상 감사하다며 덕담을 주고받는 사이였는데 이제는 멀리서 보이면 슬며시 돌아서 가는게 편한 사람.
결국, 나의 퇴사가 공지되기까지 이 모든 사람들에게 직접 전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중 몇몇 사람에게는 한동안의 단절을 깨고 용기내어 먼저 소식을 전했다.
진짜 나가냐, 그렇게 빨리 나가냐, 오래 다녔는데 가시는거냐.
놀라는 눈빛 다음엔 묵직한 정적이 흐른다.
이렇게 쉽게 말을 걸 수 있는 거였다면, 꼭 퇴사가 아니었어도 먼저 다가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잠깐, 들지만 이내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 사람과 나는 같이 일하다보면 결국 다시 틀어졌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아름답게 끝낼 수 있는건, 내가 이 무대에서 사라짐으로써 더이상 우리 사이에 벌어질 충돌이 없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한 사람 중 한 명은 나와 나이도 같고 성격도 잘 맞아서 회사 안에서도 밖에서도 친했던 사람이다.
우리는 회사 밖에서 친해졌다가 회사 일로 틀어졌고, 회사 일로 부딪히다가 다시 회사 밖에서 화해했다. 그러다 결국엔 또 회사 일로 멀어졌다.
또다시 멀어지면서, 이 사람과는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퇴사해도 이 사람은 만나지 않을거라고, 지금 이렇게 이 사람을 보낸다해도 잃을게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퇴사할 때가 되니 우리가 틀어진 계기들이 회사 밖에서도 그렇게 중요하게 느껴질까 하는 의문이 들어서, 조직의 일 때문에 내 사람을 잃는게 과연 잘하는 일일까 하는 회의가 들어서 먼저 말을 건넸다.
그 사람은 다음날 나에게 신발을 선물했다.
이거 신고 더 좋은데 가라며, 나 몰래 자연스럽게 내 취향을 떠보더니 선물을 건네는 것이다.
말 안하고 퇴사해버릴까도 생각했던 내 마음이 너무 미안했다.
이 사람에게 나는 뭘까.
우리가 틀어졌던 것이, 그리고 또다시 어색한 듯 애써 아닌 듯 정말 그런 듯 화해한 것이 이 사람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신발을 보며 생각한다.
내가 퇴사를 안했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화해했어도 결국엔 회사 안에서 또 틀어졌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관계에서 도망쳐야한다. 이 반복되는 굴레에서 말이다.
내가 회사를 나옴으로서 우리의 관계는 마지막 정리했던, 약간은 애매한 단계에서 멈출 것이다.
어쩌면 더 좋아질 여지도 있겠지.
나는 이 신발을 보며 생각한다.
더 멀리 멀리, '나쁜 사람 되기'의 반복에서 벗어나자고.
나는 왜 나쁜 사람이 됐을까 생각해봤다.
그건 아마 우리의 관계에 감정을 너무 많이 투여해서이지 않았을까.
'남들은 몰라도 니가 이럴 줄은 몰랐는데'
'내가 과장님 진짜 좋게 봤는데'
이런 실망과 분노들로 나는 일과 사적인 것을 분리하지 못했고,
결국 사람에게 화가 났으면서 일에 화를 내버린 것이다.
나는 그렇게도 어리숙했던 사회초년생이었다.
부디 다음에 가는 곳에서는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아무에게도 나쁜 사람이 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