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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니 May 11. 2020

그저 휴가를 떠나는 것 같은데 마지막이라니

퇴사 D-day

퇴사 D-day / 2020. 02. 28의 기록


전날 팀원들과 송별회를 하고, 이틀 연속 해장하느라 너덜너덜해진 간으로 마지막 출근을 했다.


그래도 이날은 평소보다 10분 일찍 일어나서 화장도 집에서 완벽히 하고(평소에는 버스에서 급하게 마무리하곤 했지만,) 평소보다 일찍 도착해서 여유롭게 걸어갔다. 속은 좀 안좋아도, 마지막 출근길이라는걸 애써 자각하며 걸었다.


그런데 내 눈에는 여전히 평소와 똑같은 풍경의, 공사장이 널부러져있고 차도가 길게 펼쳐진

아무 감흥이 없는 도로일 뿐이었다.

이 길이 마지막이라니. 내가 이 거리를, 이 걸음을 그리워하거나 추억할 날이 올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냥 내일부터 휴가를 떠날 것 같은 정도의 설렘이다.

 

나는 입사이래 처음으로, 해장하기 위해 근무 시간에 1층 편의점에서 회사 친구와 라면을 먹었다.

2년 내내 상상도 못하던 일이었지만 어차피 마지막인데 어때-하는 배짱이었다.

이유 없는 반항은 아니었고 도저히 이 속으로는 일을 마무리 하기 힘들 것 같아서였다.


퇴사 직전까지 붙잡고 있던 일이 있었다.

이것까지 잘 마무리되고 가면 정말 후련할 것 같은데, 마음처럼 일이 흘러가지가 않았다.


(여기부터 조금 TMI)

온갖 티키타카 끝에 단가를 겨우 맞춰놨는데, 결국엔 키워드량이 적어서 제품 자체가 엎어졌다. 애초에 내가 제품 출시를 제안한 것도, 결정한 것도 아니었지만 공들여서 진행하던게 갑자기 무산되니 허무했다.

발주 취소라도 깔끔하게 해놓고 가려고 했는데 담당자가 나한테는 알겠다고 해놓고 대리님한테 협상 전 단가로 납품을 강행하겠다고 통보를 했다.

내가 다시 전화해서 항의했지만, 마지막 날에 모든 걸 정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내가 마무리하지 못한 일이 이 하나만은 아니겠지. 아직 나를 포함해서 아무도 모를 뿐.

3주를 정리하고 준비한 퇴사인데, 왜 마지막은 이렇게 정신이 없는지 모르겠다.


부랴부랴 인수인계서의 나머지 부분을 작성하고, 미처 버리지 못한 내 책상 위의 잔해물들을 버리고,

친한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내가 속한 대화방을 정리하고 컴퓨터 비밀번호를 바꾼다.

 

3시쯤 짐을 다 싸고 엘레베이터에 나가는데, 팀원들이 배웅해주려고 우르르 나와주었다.

다른 팀 친한 사람들도 모두 나와있다.

알고보니 같은 팀 친구가 내 동향을 보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고 한다.


사실 실감이 안난다.

이러고 나가도 며칠 후에 다시 돌아올 것만 같다.

그저 당장 내일만 회사를 안 나올 것 같은데, 이런 배웅을 받는게 새삼스럽다.


한 명 한 명의 눈을 바라보지 못했다.

마지막이라는 아련한 느낌을 내고싶지 않았다.

나는 어차피, 볼 사람은 계속 볼거니까, 마지막인 것은 그저 나에게 안 맞았던 회사에서의 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나는 아쉬워 할 이유가 없어.

여러분도 아쉬워하지 마세요. 어차피 볼 거잖아요, 그쵸?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작별의 눈빛들이 너무 무거워서,

얼굴에 조금이라도 담겨있는 '마지막'이라는 단서들이 부담스러워서 똑바로 마주할 수 없었다.

 

그렇게 사람들 사이의 허공을 보며 웃고, 떠들고, 인사를 하고 서둘러 엘레베이터 문을 닫아버렸다.

그게 '마지막'이었는데.

나의 마지막 퇴근이 이렇게 순식간에 허둥지둥하며 지나가버렸다.


회사를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가는데, 그 길이 어색하다.

경비아저씨가 일찍 퇴근하시나봐요~ 하신다.

실은 오늘 퇴사한거라고 이야기할까? 머뭇거리는 동안 출차하는 차에 아저씨의 시선을 빼앗겼다.

나는 다시 걸음을 뗀다.

길이 여전히 참 길다.


날씨가 좋다. 아직 2월인데 봄날씨 같다.

아까부터 꾹꾹 참았던 두통은 점점 심해지는 것 같다.

가는 길이 너무 허전해서, 누구라도 붙잡고 하소연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앞으로는 이 시간에 연락해도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텐데,

이런 애매한 시간에 울적해질까봐 걱정이다.

결국 허전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깐의 통화를 마치고 나니, 동기 언니에게 전화가 와있었다.

다시 전화를 거니 우리 팀 친구와 함께 카페테리아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전화 했던거였다. 나를 배웅하고 다시 들어가기 싫어서 전화했다고 한다.

이 귀여운 언니와 친구를 두고 나오다니..언제 이런 편안한 사람들과 또 일할 수 있을까.

경쟁심이나 시기라곤 전혀 없는 천진한 사이.


퇴사를 고민할 때도 알고 있었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으로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는 이 관계들이, 회사를 나가고 나면 엄청나게 그리운 것이 될 거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람만 보고 회사를 다니기엔 너무나 짓눌려있었고, 결국엔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포기했다.

나는 이 관계들을 회사 밖에서도 얼마나 지켜낼 수 있을까.

이 소중함과 천진함을 내 곁에 유지할 수 있을까.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버스 안에서도 점점 두통이 심해져왔다. 속이 메스꺼웠다.

술을 이틀 내리 마셨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많이 마신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했다.

이 좋은 날씨에 바로 집에 들어가는게 아쉬웠지만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서 바로 들어갔다.

 

짐을 정리할 틈도, 사람들에게 받은 선물을 꺼내놓을 여유도 없이 옷만 갈아입고 화장도 안지운채 바로 침대로 들어갔다.


그렇게 내 퇴사는 정리되지 못한 채 실감하지도, 만끽하지도 못한 채 어영부영 지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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