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D+1 대학생
2020. 2. 28의 기록
퇴사 후 첫 날에는 응당 알람 없이 자도 습관처럼 이른 아침에 깼다가, 회사에 가지 않는 다는 걸 깨닫고 행복하게 다시 자는게 정석인데. 나는 병원 예약이 있어서 오히려 평소보다도 일찍 일어나 화장도 못한채 후다닥 뛰쳐나오면서 백수로서의 첫 하루를 시작했다.
대학생 때부터 모교 대학병원에 정기적으로 내원하곤 하는데, 올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
이상하게 내가 학교에 올 때마다 대부분 비가 온다.
학교 정문은 언제나 어제도 왔던 것처럼 익숙하다.
이런 우중충하고 쌀쌀한 날씨 또한 익숙한 기분이다.
퇴사 다음날 학교에 오니, 마치 돌고 돌아 다시 대학생 때로 돌아간 듯한 착각도 들었다.
이 곳은 나의 낭만이 있던 곳.
내가 무엇이든 마음껏 꿈을 꾸었던 곳이다.
한 동안 나의 일기장에는 대학 시절에 대한 그리움으로만 가득 차던 때가 있었다.
나는 그 때의 나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이제 나는 무언가 되어버려서, 앞으로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좌절에 빠져있던 때였다.
솔직히 말하면 대학생 때도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 때 나의 발목을 잡았던 건 학벌, 영어 이런 것들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미 돌이킬 수 없거나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은 것들.
그렇게 대학생이 되어서 나의 세계는 한 번 좁아졌지만, 그래도 나는 그 안에서 행복했던 것 같다. 좁아지는 정도를 줄일 수는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래서 열심히 학점을 관리하고, 대외활동을 하고, 이런저런 공부를 했다.
그렇게 나의 세계를 넓혀가는게 즐거웠다.
하지만 직장에 들어가면서 열심히 넓혀야 할 가능성도, 발전시킬 이유도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이미 나는 규정되어 버렸기 때문에.
사실 내가 속하게 된 집단 안에서도 더 깊어지고 뛰어나기 위해선 '열심'이 필요했다. 어느 집단이든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선 노력을 요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 노력의 방향이 이미 정해져 버렸다는 것이 나를 좌절하게 했다.
이제 나는 조금의 희망을 찾는다.
퇴사를 하면서 이미 나를 규정했다고 생각한 것들, 그러니까 전문 분야나 직무, 혹은 직장인 같은 정의들이 모두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사라지면서 불안감은 늘었지만 가능성은 무한해졌다.
물론, 지금도 대학생 때와 마찬가지로 나의 세계를 좁히는 것들이 있다.
지금 나의 발목을 잡는 건 나이, 경력 같은 것들이다.
내게는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것들 같아보인다.
하지만 이 안에서도 어떤 방식으로든, 나의 세계를 넓힐 방법은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 때처럼 똑같이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 때의 나처럼 되고싶다.
지금보다 아는 것도 훨씬 적고 사회 생활 기술도 형편 없지만(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내 자신은 희망찼던 그 때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