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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니 Aug 16. 2020

다섯 번째, 1인 가구로의 첫 독립

잘 몰랐기 때문에 세상이 아름다웠던 시절

얼마전에 대학교를 다녀왔다.

6개월에 한 번씩은 가는 학교이지만, 반년 마다 주변 가게들이 변하는 걸 보면 기분이 이상하다.

한 때는 이 동네의 매일의 변화를 캐치하고, 새로 생긴 가게를 바로 시도해보곤 했었는데

이제는 이 곳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학교 건물도 새삼 참 낡았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다닐 때도 저렇게 오래됐었나, 아니면 나랑 같이 감가상각되어 가는걸까.

코로나 때문에 외부인의 건물 출입을 막아놔서 강의실과 매점은 못 보고왔지만(내가 외부인이라니!), 캠퍼스는 둘러볼 수 있었다.

구석구석에 내가 앉아서 고민하던 자리,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던 벤치, 막 사귄 남자친구에게 보여줄 사진을 찍던 곳-과 같은 추억들이 묻어있다.


남들은 어땠는지 몰라도 나에게 있어서의 대학시절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다.

그 어떤 고민도 결국엔 희망찬 미래로 결론나던 시절, 내 인생에 조금 덜 현실적인 문제들(기아 문제, 역사, 인간이라는 존재 등)에 마음껏 현실의 시간과 마음을 쓸 수 있었던 시간.


그때를 그리워하는건 아직도 내가 그런 시간을 갈망하고 있어서는 아닐까 생각해본다.

모름지기 인간이란 어찌됐든 제 몫의 벌이는 해야되는데,

나는 내 삶의 시간을 그저 돈 버는데만 쓰는게 아까워서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던 때를 그리워하는건 아닌지.

그 시절도 결국 나를 부양해주는 누군가 있었기에 누릴 수 있던 시간들인데.


-

성인이 돼서 다섯 번째로 짐을 푼 곳은 학교 주변의 원룸이었다.

그 전까지는 룸메와 함께 살았는데, 처음으로 온전히 혼자 살기 시작했던 방이다.

겁은 별로 없는 타입이라, 혼자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고 생활패턴이 잘 안맞았던 룸메를 떠나 - 또 누군가와 맞춰야 할 필요 없이 온전히 나만의 공간을 가지게 되었다는 설렘이 컸다.


하지만 막상 지금과는 매우 다르게 나는 나만의 공간을 무척 투박하게 두었다.

잠은 집에서 가져온 매트리스를 그저 바닥에 놓고 매트와 이불을 놓고 잤고,

책상도 원래 옵션으로 딸려있던 촌스러운 나무 책상을 그대로 사용했다.

벽지무늬나 화장실은 어땠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중간 문이 없어서 냉장고와 싱크대는 내 방 생활공간과 그대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때가 아마 내가 대학교 3학년이 된 때였을 것이다.

나는 4학년이 되기 전에 휴학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방에 그렇게 오래 머물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있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방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이리저리 꾸미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 공간은 나만의 것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에게 안락함을 주었다.

이 후 옮겨다닌 많은 자취방에서는 방을 정말 열심히 꾸몄지만, 이 방만큼 안락하고 내 공간처럼 지낸 적은 없는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취방에서 보낸 시간은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워낙 틈만 나면 나가고 보는 성격이라 집 바로 앞에 친구들, 식당, 도서관, 카페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데 굳이 방에 있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시험기간 밤샘 공부를 해야되는데 몸이 너무 피곤할 때면 렌즈를 빼고 편한 옷을 입고(그렇다. 나는 집 앞 편의점을 갈 때도 츄리닝 따위는 입지 않던 종자였다.) 방 책상에 앉아 믹스커피를 잔뜩 타서는 꼴딱 밤을 새기도 했다.

이 시기는 전과 후 성적이 우상향하고 있던 때라, 나름의 성취감과 기쁨이 있었다.

내가 경영학과로 간 건 잘한 선택이야. 내 적성에 맞는 길이야 - 라는 안도감.

지금 생각해보면 성적표로 안정을 찾기 보다는 좀 더 장기적인 인생 계획을 세웠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있다.


이전의 나는 어차피 인간이 노동을 하고 살아야한다면, 그 노동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쓰이길 바랐다. 그렇게해야 내 노동력이 덜 아까울 것 같았다.

내 노동력의 값을 올려야지-가 아니라 나의 노동으로 나도 먹고 살고, 남도 먹여 살리는 방향으로 가치를 높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생각보다 내 노동의 가치가 너무도 박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해외파 출신에, 명문대를 나와서 국제기구 정도는 들어가야 영향력이 생길 것 같았고, 조그마한 단체에 들어갔다가는 그 단체를 지키기 위해서만 힘쓰다 끝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박하게 행해지는 일이 그렇게 영향력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결국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많이 끼치려면 그 사람이 잘나야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점점 깨달았다. 내가 그렇게 잘나지 않았다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유익이 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나는 그냥 그런 가치에 대해 생각하기 싫어졌다.

그래봤자 나는 온전히 헌신할 용기도 없는 사람이었고, 다른 곳에서 비슷한 의미를 찾는다는 건 일종의 정신 승리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가치있는 세상을 만든다는 것, 더 나은 삶을 만든다는 신념같은 건 현실에는 없다고 치부해버렸고 그런 슬로건을 내미는 사람들을 볼 때면 괜히 짜증이 났다. '저 사람들은 왜 아직도 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나를 짜증나게 하는거지?'


그래서 내가 택한 길은 무엇이냐.

철저히 상업적인 곳으로 가리라. 남을 위한다는 겉만 번지르한 슬로건 따위 외치지 않는, 그저 대놓고 돈을 많이 벌고 싶어하고 그로써 성과를 낼 수 있는 곳으로.

그런 방향으로 틀고 나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두 번째 회사로 오고나니 이 업계의 작동 원리가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내 마음 한 구석에는 건강식품 업계에 있다보면, 나중에 국제 사업 같은데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작은 희망이 있었는데 갈수록 이 또한 현실에서 벗어난 몽상에 비슷하다는 걸 깨닫고 있다.


-

하지만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든다.

현실을 바꾸는 건, 현실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그런 몽상가들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사업도 그 업계를 잘 안다고해서 잘 되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사람이 뛰어들어도 잘 될 수 있는 것처럼.

인생도 잘 모르는 사람이 멋모르고 뛰어들어서 마구 헤집고, 만들어가는 사람이 결국엔 원하는 걸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더 나은 삶, 가치있는 세상을 외치는 사람들도 '아는 것(현실)'에 비중을 두지 않고 '바라는 것'에 비중을 두고 사는게 아닐까.

아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는 순간 눈 앞의 현실은 절대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바라는 것을 추구하는 행동이 있다면 눈 앞의 현실은 변화시킬 대상이 되겠지.


그래서 나는, 잘 모르는 사람으로 남고싶다.

대학생 때 가치있는 삶에 대해 너무도 쉽게 정의 내리고, 무작정 갈망하던 것처럼

이직하기 전에는 '이직하면 더 행복해질거야'라고 굳건히 믿으며 희망을 가졌던 것처럼

어학연수를 가면, 송파에 다시 살면 삶의 불행이 다 사라질 것으로 믿었던 것처럼.


아직 모르는 것을 향해 마음껏 갈망하고, 희망하고, 추구하고 싶다.

그리고 이제는 그 모르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방향대로 설계해나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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