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프로그램에 필요한 소품을 구입하러 동대문에 있는 어느 시장에 갔다. 시장 안을 돌아다니다가 필요한 소품이 없어서 다른 시장으로 가야 했다. 지하 주차장으로 가려고 하는데 시장 건물이 워낙 크고 복잡해서 엘리베이터가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급한 마음에 바로 앞 가게 아주머니에게 물어봤다.
“여기 혹시 지하 5층 주차장 가려고 하는데 엘리베이터가 어디 있나요?”
아주머니는 다른 아주머니들에게 뜨개질을 가르쳐주고 있는 듯 보였다. 내 목소리에 등을 보이고 있던 아줌마가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내가 서있는 곳으로 오며
“저 통로 끝에서 오른쪽 길로 가세요. 그리고 물어보는 건 좋은데 내가 일하고 있으니까 여기 앉아 있는 오빠(아주머니 가게 옆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나 다른 사람한테 물어봐야지”
라며 말하더니 다시 아주머니들이 있는 쪽으로 가는 게 아닌가.
다른 아줌마도 맞장구를 쳤다.
"맞아"
아주머니의 표정과 말투는 시장 밖의 날씨만큼이나 차가웠다.
'왜 옆에 앉아 있는 남자나 다른 사람도 있는데 나한테 물어봐서 내 일을 방해하냐’라는 의미로 들렸다. 아주머니의 말에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고 무안해지기까지 했다. 같이 소품을 사러 왔던 후배 PD와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일단 우리는 아주머니가 알려준 통로로 걸어가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며 부정적인 감정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잘못했나? 뭐야. 갑자기 짜증 나려고 하네...’
하지만 이내 그 감정들을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주머니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누군가를 열심히 뭘 가르치고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나에게 길을 물어본다면 어떨까? 내 옆에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도 굳이 나에게 물어본다면?
역지사지해보니 나도 아주머니를 배려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배려했다면 물어보기 전에 조금 더 둘러보고 한가해 보이는 다른 가게 주인이나 지나가는 사람한테 물어봤었어야 했다. 다만 아주머니가 나에게 무표정과 차가운 말투보다 웃으면서 더 이야기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도 후배 PD 앞에서 그냥 짜증 내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잠시 아주머니의 입장이 되어보고 나를 반성했다. 꼭 책을 통해 지식을 얻지 않아도 잠시 사색을 하며 깨닫는 것도 배우는 게 아닐까?
<사색이 자본이다>의 책 저자 김종원 작가님의 페이스북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지금 여기에서 답을 찾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멀리 떠나도 답을 찾을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여기에서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굳이 멀리 떠날 필요가 없다."
여행을 떠나야만 답을 찾는 게 아니라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여기 일상에서도 충분히 답을 발견하고 찾을 수 있다는 메시지였다. 그럴지도 모른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지구별을 여행하고 있는 중이니 일상 자체가 늘 여행이다. 그러니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통해서도 충분히 사색을 하면 발견하고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하루는 이렇게 많은 에피소드들이 모여서 지나가고 '나'라는 사람도 완성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오늘 아주머니와의 에피소드를 통해 배우고 깨달았기에 오히려 아주머니에게 고맙다는 미소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