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 동물들에게
도시 사람들이 동물을 접할 기회는 예전보다 많지 않다. 시골에서 자란 어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 속에는 두꺼비, 까치, 뱀, 송아지 같은 생명이 흘러넘쳤다. 동물로 장난을 쳤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나쁜 마음을 품거나 대규모로 죽이지는 않았다. 야생의 자리에는 도로와 건물이 들어섰고 동물들은 어디론가 숨거나 아스팔트 위, 유리창 아래서 죽은 모습만을 남겼다. 수많은 동물이 인간의 영역 확장으로 인해 사라졌다.
동물원은 사람들이 다양한 동물을 처음으로 대면하는 곳이 되었다. 갇혀 있는 동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한 채 동물원 입구에 들어선다. 두 존재 사이에 철장이나 울타리가 있다. 부자연스러운 환경에서 살고 있는 동물의 모습을 본다. 생각해보면 이는 매우 인위적이며 철학적인 순간이다. 1968년 만들어진 영화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외계인은 호텔방처럼 꾸며 놓은 장소에 한 사람을 두고 관찰한다. 과연 그런 모습을 보고 사회적이며 창의적이고 때로는 파괴적인 인간의 삶을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인간 중심의 시선이 반영된 동물의 모습과 시간을 보는 행위는 그 동물 자체의 모습이 아니기에 왜곡될 수밖에 없다.
동물원은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려 노력하고 있지만 부족한 능력, 예산, 관심으로 한계에 부딪힌다. 정부에 속한 경우에는 예산을 축내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고, 손님이 줄어든 사립 동물원의 경우 동물들이 굶거나 죽거나 팔려간다. 앞으로 동물원이 동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생태공원이나 보전센터로 변화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오히려 동물 카페라는 기형적인 공간이 생기는 세상에서 앞으로도 더욱 굴절된 유리를 통해 동물을 보게 될지 모른다.
현재 동물원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자연의 흔적을 더듬는다. 동물원법이 생겨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했지만 법이 정착하는 과정, 미흡한 법의 사각지대에서 동물들은 여전히 고통받는다. 동물원 동물이 야생동물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동안에도 동물들의 삶이 나아지는 속도는 더디다. 동물원은 앞으로 동물이라는 존재 자체를 존중하는 환경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사람들은 동물원에서 5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한 동물을 바라보고 즐거운 시간을 얻다. 그곳에서 평생을 사는 동물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을지 생각해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