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태즈메이니아 데빌 언주(Tasmania Devil Unzoo) 방문
동물원을 찾아다니는 여행을 하며 가장 가보고 싶던 곳들 중 하나가 언주(Unzoo)였다.
미국 동물원 디자이너 존 코(Jon Coe)의 정의에 따르면 동물원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데려온 동물들을 사람들이 와서 볼 수 있도록 케이지나 방사장에 가두고 번식시키고 과학자들이 연구하는 장소인 반면, 언주는 대중이 실제 또는 재현된 서식지 안에 스며들어 상호작용을 통해 야생동식물과 생태계를 배우는 곳*이라 했다.
호주 남단에 있는 태즈메이니아 섬으로 갔다. 동물원의 미래가 궁금한 나에게 어떤 해답을 줄지 기대됐다. 호바트에서 차로 한 시간을 달려 언주에 도착했다. 마침 입구에서 설립자인 존 해밀턴(John Hamilton)을 만났다. 멀리서 찾아왔다고 하니 친절하게도 직접 안내를 해주셨다.
해밀턴 씨는 1978년에 과수원 부지를 사 이듬해부터 '태즈메이니아 데빌 공원(Tasmanian Devil Park)'을 운영하고 있었다. 어미를 잃은 새끼 태즈메이니아 데빌(이하 데빌)을 보살피는 것으로 시작한 보호 활동은 번식 및 보전 활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이곳에서 데빌의 생태적 중요성과 멸종위기를 알리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존 코를 만나 2007년부터 언주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2014년에는 '태즈메이니아 데빌 언주(Tasmania Devil Unzoo)'로 이름을 바꿨다.
동물원을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언주는 울타리를 하나 둘 없애고 지역 야생동물을 위해 토종 식물을 심었다. 안 쪽으로 들어가니 바다와 연결된 탁 트인 공간이 나왔다. 쌍안경으로 보니 저 멀리 야생 흰배바다수리 둥지가 있었다. 가이드가 물고기 한 마리를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 두고 왔다. 바다수리가 먹으러 오기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그 밖에도 다양한 바다새들이 보였다. 야생 바다수리는 보지 못했지만 갇혀있는 바다수리를 보는 것보다 나았다.
남아있는 낡은 케이지들이 몇 개 보였다. 바꾸기 위한 예산을 모으는 중이라 했다. 한 케이지 안에는 누군가의 애완동물이었다가 구조된 앵무새들이 있었다. 주인들이 '기증했다'라고 쓰여있었다. 기증이라는 말에 들어있는 선한 의미가 이렇게 쓰이는 게 싫었다. 단지 버렸을 뿐이다.
작은 코렐라 한 마리가 가까이 다가와 '헬로'라고 소리 냈다. 설명판에는 50살이 넘은 '치키'라고 쓰여 있었다. 내 앞에서 서성대며 관심을 원하는 듯했다. 베란다의 작은 새장에서 살다가 이 곳으로 왔으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착잡했다. 수명이 50년이 넘는 이들에게 이만한 크기의 삶이 전부라니. 날아다닐 수 있었던 그 큰 세상을 빼앗고 인간에게 의지하게 만들다니.
언주를 나와 차를 타고 데빌 서식지 내 카메라 설치 장소로 갔다. 카메라 앞에 데빌을 끌어들일 동물 가죽을 매달았다. 로드킬로 죽은 왈라비였다. 메모리 카드를 빼서 작은 나무 판잣집에 들어가 노트북으로 영상을 확인했다. 먹이를 먹는 데빌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데빌 가슴의 하얀 무늬가 개체마다 달라 이를 통해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귀도 뭉툭하고 반달가슴곰 가슴에 있는 하얀 무늬가 생각나서 작은 곰 같아 보였다.
화면으로 데빌 얼굴에 상처가 없는지 확인했다. 질병 확인을 위해서였다. 데빌의 얼굴과 목에 큰 혹이 생기는 이 질병(Devil Facial Tumour Disease)은 1996년 첫 발견 이후 태즈메이니아 전역으로 무섭게 퍼졌다. 서로 물고 뜯으며 싸우는 과정에서 전염되어 개체수의 95%가 사라졌다.
데빌은 유대류이자 육식동물로, 생태계 최상위를 차지하는 중요한 동물이다. 호주 본토에는 딩고의 유입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태즈메이니아에만 남아있기 때문에 이들을 시급히 지켜야 했다. 해밀턴 씨는 이 지역으로 연결된 유일한 길목인 이글호크넥을 막고 모니터링을 계속 해왔다. 한편 야생 복원 프로그램을 지원하면서 야생에 적응하지 못한 데빌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은 언주 입장료(39달러)를 포함해 성인 한 사람당 120달러를 내는 한 시간 반짜리 '데빌 트래커 투어(Devil Tracker Tours)'를 통해 제공되는 보전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가난한 여행자인 나에겐 비싸게 느껴졌지만 충분히 가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여느 동물원의 비하인드 투어에서 길들여진 희귀한 동물과 셀카를 찍고 특권의식을 느끼는 것보다 나아 보였다.
전체적으로 야생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보전활동을 하는 등 동물원에서 탈피한 모습이었지만 일부는 전형적인 동물원 그대로였다. 야생만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기에 부족했던지 버드 쇼와 캥거루 먹이주기가 있었다. 버드 쇼에서는 다른 동물원 쇼처럼 앵무새에게 동전 가지고 오기를 시켰다. 이런 모습을 보고 좋아하는 방문객들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언주에서 야생동물들이 가능한 인간의 개입 없이 살아가는 독립적인 모습을 보고자 했던 나에게는 좀 아쉬운 장면이었다.
언주의 버드 쇼는 90년대에 도입되었다는데 지금까지 운영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동물원이 살아남기 위해 다들 하는 쇼나 먹이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언주가 동물원들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길 바랐지만 너무 완벽한 것을 바랐는지 모른다.
다만 훌륭한 점은 분명했다. 언주는 멋들어진 케이지를 만드는 데 집중하지 않았다. 규모를 늘리거나 자국에서 볼 수 없는 동물들을 많이 보유하려 애쓰지 않았다. 지역 야생동물들을 위해 서식지를 지키고 지켜보면서 그 동물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허울뿐인 보전활동을 하는 많은 동물원들을 보았기에, 직접 앞장서서 데빌을 구하는 모습을 보니 좋은 방향성을 가진 동물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