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링컨파크 동물원
시카고에 도착했다. 당시 친구가 그곳 영화학교를 다니고 있어 만나기로 했다. 링컨파크 동물원과 브룩필드 동물원, 쉐드 수족관을 가볼 겸 해서 정한 목적지였다. 친구를 만나 고맙게도 시카고 미술관 티켓을 선물받았다. 여행을 다니면서 마치 일의 연장선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덕분에 보고싶은 작품들을 눈으로 보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고흐가 그린 자화상과 그의 방, 풍경, 사람들을 오랫동안 보았다. 그림에는 고흐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를 읽으며 머릿속에 그려 본 그의 삶 일부였다. 그림을 좋아하는 나를 그동안 너무 박하게 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너무 쫓기듯 여행을 하진 않았느냐고 물었다. 처음에는 '다음에 다시 올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여행하자고 했으면서 어느새 '같은 값이면 미술관보다 동물원이지. 여길 또 언제 오겠어.'라며 호랑이에게 쫓기는 토끼처럼 뛰어다녔다. 한 동물원 안의 모든 동물을 다 보려고 급히 돌아 다니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다음 날 링컨파크 공원 근처에 숙소에서 동물원으로 걸어갔다. 링컨파크 동물원은 도심 내 공짜 동물원이었다. 1868년에 문을 열어 북미에서 4번째로 오래됐다지만 동물원은 깔끔하고 새로웠다. 북쪽 입구로 들어가니 동부검은코뿔소가, 그 옆에는 '월터 가족의 북극 툰드라'라는 이름의 북극곰 전시관이 보였다. 유리섬유 강화 시멘트(GRC, glass fiber reinforced cement) 바위로 둘러싸인 방사장은 흙, 얼음 동굴, 개울, 수영장, 식물 등으로 뒤덮여 있었다. 2016년 11월에 리모델링을 마쳤다니 내가 방문했을 때는 막 1년이 지난 그야말로 최신 전시관이었다. 북극곰은 물속에서 부머볼을 가지고 놀고 종이가방 안에 숨겨진 먹이를 찾으라 바빴다.
고릴라와 침팬지가 있는 아프리카 영장류 센터는 1976년에 지은 건물을 2004년에 리모델링했다. 겉보기에는 연구소 같았다. 내부 전시장은 유리로 되어 있어 안이 훤히 보였는데 인공 대나무와 덩굴, 개미집이 뒤섞여 있어 매우 복잡했다. 와중에 눈에 띄는 건 바닥이었다. 좋은 의미로 굉장히 지저분했다. 흙과 깔짚으로 뒤덮여 있고 먹이가 흩뿌려져 있어 거의 모든 동물들이 먹이를 찾는 데 열중했다. 먹이를 뿌려주는 장치, 선풍기, 물 스프레이가 설치되어 있는데 동작 감지 센서가 있어 동물이 직접 작동시킬 수 있었다. 제한적이긴 해도 복잡하고 선택권이 있는 공간이었다.
동물원 중심부에 위치한 코블러 라이언 하우스는 꽤 오래돼 보였다. 자료를 찾아보니 1912년에 지어진 건물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양쪽으로 칸칸이 늘어선 내실이 보였다. 다만 하얀 판으로 가려져있어 동물은 보이지 않았다. 건물 바깥쪽에는 해자로 둘러싸인 사자와 호랑이 방사장이 있었고 다른 편에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의 철망 케이지들이 붙어 있었는데, 그 안에는 여러 고양잇과 동물들이 보였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설표(Snow leopard, Panthera uncia), 아무르표범(Amur leopard, Panthera pardus orientalis), 아무르호랑이(Amur tiger, Panthera tigris altaica)는 정형행동을 하고 있었다. 패이싱(pacing, 일정 구간을 왔다 갔다 하는 행동)이었다. 정형행동은 스트레스, 자극 없는 환경 또는 중추신경계 장애로 일어나는 비정상적 행동이다.
육식동물이 정형행동을 하는 원인은 사냥 본능 좌절, 먹이를 먹기 전의 흥분, 탈출하고자 하는 욕구, 계절 등에 따른 성 호르몬 변화 등이다. 동물원 동물의 정형행동은 야생에서는 거의 볼 수 없거나 낮은 수준이다. 다양한 자극이 주어지는 야생과 달리 동물원은 자극이 부족한 환경이며 그래서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다른 한 편에서는 야생에서 관찰되지 않는다고 정형행동은 비정상으로 봐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생리적 행동이거나 자극을 줄이기 위한 보상 행동은 아니냔 말이다. 정형행동을 하는 동물이 안 하는 동물보다 상황이 더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지도 확실치 않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정형행동을 하는 육식동물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 분비되는 호르몬인 코티솔 수치가 높다. 호랑이와 사자 등 큰 대형 고양잇과 동물 옆에 사는 삵에게 상자와 나뭇가지 등 숨을 곳을 마련해 주었더니 코티솔과 함께 정형행동이 감소했다. 이는 숨을 곳을 제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복지 요소임을 말해 준다. 또한 정형행동으로 신체적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이빨이 나갈 정도로 철장을 씹고 자신의 몸을 해하는 행위는 절대 정상이 아니다.
다른 곳을 돌아보고 몇 시간 후 다시 갔는데도 여전했다. 동영상을 5분씩 찍었다. 고작 5분을 녹화하는데도 지루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정형행동임을 알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잠시 동물을 구경하고 사진을 찍은 후 그 자리를 떠났다. 동물원을 찾는 이들은 많은 동물을 보려고 하지 한 동물 앞에 오래 있지 않는다. 그래서 동물의 한 순간을 바라볼 뿐, 그들의 삶은 잘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적이거나 넓고 복잡한 서식지에 사는 동물들은 동물원이라는 한정된 곳에서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어렵다. 동물원은 동물복지 문제로 가장 먼저 주목을 받는 코끼리, 북극곰, 유인원의 사육 환경을 우선적으로 바꾼다. 소위 인기 있는 동물들이기도 하다. 이 동물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눈에 띄는 정형행동을 한다. 코끼리는 몸이나 머리를 지속적으로 흔든다. 북극곰도 마찬가지다. 북미 동물원 북극곰 중 85%가 정형행동을 한다. 침팬지, 고릴라 등 유인원은 벽에 머리를 박거나 앉아서 몸을 앞뒤로 흔들고 털을 과도하게 뽑거나 토한 먹이를 뱉었다가 다시 먹는다.
고양잇과 동물들도 정형행동을 하지만 패이싱이나 서클링(원을 그리며 같은 길만 걷는 행동)같은 경우 잠깐 보면 그냥 걸어가는 모습과 같기 때문에 유인원만큼 비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환경 개선은 후 순위로 밀리는 경우가 많다. 이는 잘 움직이지 않는 양서파충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어떤 동물사는 최신식이지만 어떤 동물사는 구식 그대로다. 그렇게 동물원 안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한 구석에 시간이 멈춘 곳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최근 뉴스에서 2년여에 걸친 코블러 라이언 하우스 리모델링을 거의 마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약 4천만 달러가 들었는데, 이는 '시카고의 자존심 Pride of Chicago'라는 1억3천5백만달러짜리 동물원 개선 계획의 마지막 프로젝트다.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 북극곰 전시장 리모델링이 포함되어있었다. 프로젝트의 돈이 모두 동물들을 위해 쓰인 것은 아니다. 현대식 입구를 짓는데도 많은 예산이 들어갔다.
사자의 영역이 커진만큼 아무르호랑이는 위싱턴 스미소니언 동물원으로 가게 되었다. 동물원이 보유 종 수를 줄이면서 동물이 사용하는 공간을 크고 복잡하게 만드는 것에는 찬성하지만 밀려나는 동물들이 또 어디로 가게 될지 걱정이다. 서울동물원이 미국동물원수족관협회의 인증을 충족시키기 위해 알락꼬리여우원숭이를 체험동물원으로 보낸 사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동물원 환경이 좋아질수록 동물들은 운에 따라 변두리로, 또는 뒷 방으로 가 잊혀지곤 한다.
근본적인 환경을 개선하고 변화를 주지 않으면 동물원은 시대에 뒤떨어진 수용소에 지나지 않으며 동물들은 살아있는 박제나 다름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어마어마한 예산이 든 만큼 동물들이 더 나은 삶을 얻었다고 속시원히 말하기가 어렵다. 갇혀있는 동물을 보는 불편함을 없애는 데 더 많은 돈을 쓴 게 아닐까?
시대는 빠르게 변한다. 리모델링으로 겨우 따라잡은 시간대는 또 저멀리 도망간다. 링컨 파크 동물원 영장류 센터가 25년만에 바뀌었다면 2029년이 되야 다음 기회가 온다는 말인데, 아직도 열악한 환경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동물들이 있으니 기회는 더 멀어진다. 그렇게 동물원은 영원히 시대에 뒤쳐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차라리 동물원의 한계를 인정하고 동물원을 없애거나 그 예산을 보전이나 동물 복지에 집중적으로 쓰는 게 동물들을 위한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