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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애 Oct 08. 2024

그들만의 서사가 있다 - 천운영의 ‘아버지가 되어 주오

나의 삶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까? 천운영의 ‘아버지가 되어 주오’를 읽으며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소설 속의 어머니는 재산 문제 등의 이유로 아버지와 법적으로 이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 상황에서 딸은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


- (41쪽) 이왕 서류상으로 정리가 된 거 진짜로 이혼해 버리세요. 이제부터 엄마 인생, 마음껏 누리며 사시라니까. 내친김에 그동안 내 어머니가 감내해 왔던 희생과 고통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버지의 잘못된 행태들을 조목조목 따져 물었다. 그땐 왜 그러셨어요. 지금이라도 제대로 사과하세요. 말이나 좀 곱게 하시든가, 엄마가 몸종이에요? 하녀예요? 그러다가 진짜 이혼당해요. 비난일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두 동생들에게도 거들기를 부추기며 기세를 높였다. 그렇게 나는 우리 가족과 아버지 사이에 선을 그었다. 한쪽은 명백한 가해자였고, 또 한쪽은 지금도 여전히 고통받는 피해자 집단이었다. -


딸에게 비친 어머니의 삶은 행복하지 않았다. 아버지에 의해 좌지우지된 수동적이고 희생적인 삶이었다. 그러나 그런 딸의 생각에 대해 어머니는 다소 의아한 모습을 보인다.


- (43쪽) 어머니는 어느새 내 옆에 서 있었다. 오만 원권 지폐 몇 장을 내게 내밀며, 보태라, 했다. 뭐라 토를 달기도 전에 손에 힘을 주어 내 주머니 속으로 돈을 집어넣었다. 보태. 어머니 손길에 결기가 느껴졌다. 어머니가 몸을 돌려 나와 정면으로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물었다.

넌 네 엄마 인생이, 그렇게 정리되면, 좋겠니?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네 말대로라면 내 인생 참.....

어머니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슬프지 않겠니?

나는 좀 황망해졌다. 등짝을 호되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


그랬다. 어머니의 삶은 이렇게 한두 마디로 정리될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딸의 눈에 비친 것처럼 힘든 날들을 보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어머니는 10살이나 차이 나는 아버지와 직장에서 만나,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아이를 먼저 낳았다. 애지중지하던 딸이 결혼도 하기 전 아이를 낳아 남자와 함께 할아버지를 찾아갔을 때 할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61쪽) 다시 절을 올리고 서울로 떠나던 날, 할아버지는 그제야 어머니의 이름을 불렀다. 명자야, 하고 불러 세운 다음, 어머니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네가, 저 사람 아버지가 되어 주어라.

평생을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그 말을 생각하며 살았다. 아버지는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어머니와는 달랐다. 가슴에 응어리가 많았기에 그것을 어머니에게 풀기도 했다. -


- (62쪽) 그 사람은 그게 없었지. 사랑을 주는 아버지도 없고 뒤를 봐주는 엄마도 없고. 그런 세상도 있더구나. 어떤 아버지는 자식을 죽자고 때리고 미워하고, 어떤 어머니는 저 혼자 살겠다고 자식을 매받이로 밀어 넣고 도망을 가고, 어떤 형제들은 서로 시기하고 헐뜯기도 하더구나.

그런 세상에 살았으니 원망만 남지, 울화가 치밀어 오르지, 누가 무시할까 봐 먼저 공격하지. 처음엔 저 사람이 나한테 왜 이러나, 내가 뭘 잘못해서 저러나 했어. 그 좋은 술을 먹었는데 왜 흥이 안 나고 화가 나는 걸까. 왜 매사에 날을 세우고 꾸짖고 공격을 하나. 그때마다 아버지 말을 떠올렸지.

저 사람 아버지가 되어 주어라. 아버지는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셨을까? 당부였을까 충고였을까, 걱정이었을까. 사랑을 주라는 말이었을까, 사랑을 받으라는 말이었을까. 그래서 일단 사랑을 주기로 했어. 내 아버지는 사랑을 주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사랑을 할 줄도, 받을 줄도 모르더라. 내가 주는 것이 사랑인 줄도 몰랐지. 그래서 사랑을 받는 법부터 알려줘야 했어. 끊임없이 사랑을 주면서. 그래야 또 내가 사랑을 받을 테니까.

난 희생한 적 없어. 하루하루 사랑하면서 살았을 뿐이야.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어서. 그걸 하며 살아온 거야. 네가 그걸 그저 희생으로만 생각한다면, 네 말대로 그 모든 게 그저 희생과 인내였다면, 내 인생이 그런 거였다면, 난 정말 슬플 거 같어.

어머니는 그렇게 아버지가 되었다. 어머니의 방식으로 아버지를 키웠다. 내 어머니가 키운 것은 한 남자가 아니라 한 세상이었을 것이다. 모자라고 불안정하고 허점투성이인 어떤 한 세상. 어머니는 그 세상을 품어 아버지가 되었다. -


어머니에게는 어머니만의 서사가 있었다. 할아버지와 관련된, 아버지와 관련된, 그리고 그 시절의 정서와 관련된 서사. 그 서사 안에서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비친 아버지의 모습과는 다른 존재였다. 그 서사의 어느 부분에서 그들은 함께 사랑하고 행복한 사람들이었다. 어머니의 혼전 임신이 순전히 아버지의 강제에 의한 것이라 생각했던 딸에게 어머니는 그것이 어머니의 선택이었음을, 그들의 사랑의 순간이었음을 이야기한다.


- (67쪽) 내가 이런 얘기를 자식한테까지 해야 하나 싶어서 말을 안 했는데. 느이 아빠 집에 먼저 찾아간 게 나였어. 남자 혼자 사는 집에 가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왜 몰라. 다 알았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게 있는 거야. 그날은 정말 완벽한 하루였거든. 그래서 찾아갔지. 그 집에. 완벽한 날에 함께 있고 싶어서. 그런 날에 네가 생긴 거야.

을지로 불고깃집에서 불고기를 먹었다. 불판에 얹어 구워 먹는 고기 맛을 처음 보았어. 버스를 타고 자하문 고개 넘어 세검정으로 갔다. 버스 안에서 처음 손을 잡았어. 내 손 위에 슬그머니 포개진 손이 참 듬직하고도 포근했지. 자하문. 어릴 적 아버지 월간지에서 봤던 제목이 생각났어. '자문 밖 설마담 자문이 자하문이라는 걸 그때 알았네. 그 자문 밖에는 자두밭이 많은 것도. 마침 오얏꽃이 흩날리는 봄날이었다. 자두나무 아래서 술잔을 비웠지. 아버지와 한상에 앉아 술을 배우던 날처럼 오롯했다. 여름이 되면 다시 와 자두 맛을 보자 약속했다. 자문 밖 자두 맛은 시고도 달콤하리라 생각했다. 완벽한 하루였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아름답고도 사랑스러운, 오얏꽃 피던 밤이었다. -


엄마는 왜 아빠와 결혼했어?

우리 딸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제 아빠가 마음에 안 들 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러게, 왜 그랬을까?

간혹 꼰대의 모습을 보여 분노를 유발하기도 하는 남편이기에 이렇게 대답하기도 했지만 심각한 후회를 담은 것은 아니었다. 살면서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서일까, 아니면 소설 속의 어머니처럼 한마디로 정리하기엔 쉽지 않은 우리들만의 서사 때문일까?

남편과 율동공원 황톳길을 걸었다. 길 중간에 물을 많이 받아 질척한 황토늪(?)을 만들어 놓은 곳이 있는데 남편은 황토의 미끈덩거리는 느낌이 좋다며 한참을 그곳에서 놀았다. 나는 어릴 적 모내기할 때의 진흙의 싫었던 느낌을 이야기하며 들어가지 않았다.

어렸을 때 모내기를 할 때는 나도 싫어했지. 근데 오늘은 그 느낌이 좋네. 우리는 황토집에 살았잖아. 황토 발라서 부뚜막 만들기도 했고. 그런 거 아나?

남편의 물음에 선뜻 대답이 나온다.

알지. 같은 시대를 살았는데.....


#천운영

#반에 반의 반

#아버지가 되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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