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애 Oct 01. 2024

결국은 사랑이었네 - 하지은의 ‘얼음나무 숲’을 읽고

하나. 이야기의 중심 ㅡ 바옐의 사랑 ​


- (551쪽) 그를 구원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스스로 구원하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굳게 결심했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이곳에서 벗어나겠다고. 벗어나 더 넓은 곳으로 가겠다고. 어쩌면 이 에단마저도 넘어서서 세계의 저편으로, 모든 구석진 곳으로 가 보겠다고.

그곳에서라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과 똑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 서로만을 깊이 이해할 수 있을, 자신과 진정 같은 사람. 같은 종, 혹은 가족을.

그 사람은 뜨겁게 자신을 안고 자신의 아픔을 이해한다고 말해 주고, 조심스럽고 또 사랑이 담긴 손으로 자신을 보듬어 줄 것이다. 서로의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서로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이 올 때까지 견뎌내며 지치지 않고 연습해야 했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연주해야 했다. 훗날 그가 완성하게 될 음악을 위해, 자신 말고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연주를 위해, 그를 기다리고 있을 단 한 명의 청중을 위해. -


결국은 ‘사랑’이었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아나토제 바옐이 원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자신의 아픔을 보듬어줄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사랑한 음악으로 온전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그 음악에 담긴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 단 한 명의 청중을 만나는 것이었다. 고아원에서, 그리고 자신을 입양한 곤노르에게서 온갖 학대를 당하며 자란 바옐이었기에 그 소망은 처절하리만치 간절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삶을 힘들게 하였다.



(447쪽) 놀랄 일은 하나 더 있네. 이건 절대로 과장이나 농담이 아닌데, 글쎄 여기 있는 이제 갓 열세 살이 된 소녀가 전성기 때의 나와 맞먹는 기량을 가지고 있지 뭔가 이 아이는 이미 음의 언어를 이해하고 있네. 가끔은 그것을 노래로 불러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도 하지. 놀랄 정도야. 정말 놀랄 정도야. 자네 말대로 세상에는 천재가 많더군

나는 종종 그 아이의 연주를 듣고 그에 대한 감상을 말하곤 하는데, 어제는 글쎄 그 깜찍한 숙녀가 내 냉정한 비판에 화가 났는지 이렇게 말하지 뭔가. 선생님은 어쩜 그렇게 제 음악을 이해 못 하세요? 하하. 그 당돌함이 귀엽기도 하지만 슬프기도 했네.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지만 그 모습은 어쩐지 10년 전의 나를 닮은 것 같아서 말이야. 나는 그 소녀의 미래가 나와 똑같이 흘러갈까 봐 걱정이 되었지. 그래서 물었네. 너도 너의 전부를 이해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청중을 바라니? 그러자 그 작은 소녀는 의아하다는 듯 나를 한참 바라보았어. 그러곤 되묻더군. '왜 그런 것을 바라지요? 이미 있는데. 난 정말로 놀랐네. 이미 있다고? 내 질문에 소녀는 아주 자랑스럽게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지. 여기 있잖아요. 나. 내 모든 것을 나와 똑같이 이해하고 들어주는 나 자신을 위해 연주하면 왜 안 되지요? 남에게 들려주기 위해서만 연주할 거라면, 나는 두 손만 가지면 되잖아요. 하지만 귀가 있다는 것은 나 또한 내 연주를 듣기 위해서예요' 소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는 또다시 연습을 시작했지. 아...... 그 일이 있고 나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네. 너무 오래 전의 그 일들이 꾸역꾸역 밀려와. 내가 단 한 번이라도 오롯이 나 자신을 위해 연주한 일이 있었을까? 나는 기억해 낼 수가 없었네. 대신 자네를 떠올렸지. 그래서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된 걸세. -


바옐이 소녀처럼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또한 귀가 있었는데, 누구보다 섬세한 귀가 있었는데...... 그러나 바옐은 그러한 자존감을 가질 만한 환경을 갖지 못했다. 많은 결핍은 끊임없이 무언가에 집착하게 했다.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재능을 보인 음악에도, 자신의 음악을 들어줄 청중에게도 그러한 집착이 닿아 있었기에 그의 삶은 평화롭지 않았다. 그러나 바옐을 탓할 수는 없다. 사람은 생각보다 자신의 결핍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둘. 우정, 동경, 질투 그 복잡한 관계를 생각하다.​


소설은 바옐과 고요, 그리고 트리스탄 세 친구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음악 도시 에단의 ‘영원한 드 모토베르토’인 바옐, 어려서부터 바옐의 좋은 친구였던 첼리스트 트리스탄 발제, 그리고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리고 뛰어난 재능을 지닌 피아니스트, 고요 드 모르페가 그들이다.

에단 음악원의 뛰어난 인재였던 이들은 오랜 세월 친구로 지내지만 그들의 관계가 평탄하지만은 않다. 사교성이 좋은 트리스탄은 두 사람 모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만, 고요와 바옐의 관계는 늘 아슬아슬하다.

고요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인 바옐을 동경하며 그의 음악을 이해하는 유일한 청중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바옐에게 인정받지 못해 괴로워한다. 고요는 평생을 바옐의 음악을 동경하며 사랑하지만, 그것은 때로 자신의 음악적 발전에 독이 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인정하는 재능을 바옐과 비교하여 과소평가함으로써 성장이 더디기 때문이다.

바옐은 고요에게 까칠한 태도를 보이며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것은 음악적 실력에서 오는 우월감일 수도 있지만, 고요의 환경과 그의 순수한 음악에 대한 질투와 열등감의 표출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음악을 알아줄 청중이라 생각했던 키욜이 ‘순수하다’는 이유로 고요를 선택했을 때 질투는 절정에 달한다. 순수는 바옐의 성장환경상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두 사람이 만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특히 고요의 경우는 바옐과의 관계에서 손해를 많이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바옐이 없었다면 고요가 평화롭게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수시로 일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를 흔들어놓는 바옐로 인해 고요의 음악에 대한 열정이 더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가 진정으로 좋아한 바옐의 음악에 닿고자 하는 마음으로. 무엇이 정답일까? 삶은 참.... 어렵다.

트리스탄은 따스함과 안타까움으로 기억된다. 곤노르의 집에서 쉴 새 없이 바이올린 연습만 해야 했던 바옐에게 유일한 친구가 되어 주고 이름까지 지어주었던 트리스탄, 고요와 바옐의 아슬아슬한 관계의 중재자가 되어 주었던 그는 사랑하는 여인 키세를 따라 죽음을 맞이한다. 음악만큼 사람들과의 관계에 의미를 두었던 그였기에 고요와 바옐에게는 편안하게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고, 트리스탄은 그들에게 진정한 우정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들 관계의 한편에 환타지적 인물인 악세 듀드로ㅡ 필사가 듀프로ㅡ가 등장한다.  음악 도시 에단을 만들었다는 음악 천재인 그는 친구의 질투 때문에 죽었다가 바옐의 바이올린 연주로 2000년 만에 다시 살아난다. 바옐의 천재적 재능을 알아본 그는 바옐의 음악을 통해 에단을 예전의 음악 도시로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바옐의 음악적 행보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살해한다. 바옐의 음악을 진정 사랑했고, 바옐이 그토록 찾던 단 하나의 청중이었던 듀드로였지만 잘못된 집착과 행동은, 그를 바옐이 사랑하는 여인과 음악까지도 앗아간 악마로 만들고 말았다

나는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들이 보이는 남다른 사고, 열정을 지켜보는 것이 재미있다. 그러나 불나방처럼 음악에 뛰어드는 소설 속의 인물들을 보면서, 그로 인해 기쁨만큼의 고통도 받는 음악가들을 지켜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들에게 '적당한 선‘은 쉽지 않은 걸까?


(456쪽) 나는 그만 허리를 펴고 바옐을 돌아보았다. 소녀는 그사이 나를 지나쳐 바엘에게 쪼르르 달려가 그의 팔을 꽉 붙들었다. 바옐에게 눈으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바옐은 나를 붙잡을 듯 말듯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기다리지 않고 문밖으로 나섰다.

아무튼 누군가가 곁에 있어 다행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걸음이 생각보다 떼기 어렵지 않다는 것에 조금 놀랐다. 그렇게 몇 걸음 더 걸어서 울타리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청아한 바이올린 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숨조차 멈췄다. 그 매끄러운 음색은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천천히 뒤로 돌아 작고 아담한 오두막집을 바라보았다. 소녀와 바옐의 연주는 너무도 비슷했지만, 이 곡만큼은 도저히 헷갈릴 수가 없었다.

왠지 이 곡, 자네한테 어울려.

우리 모두 젊고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유난히 새하얗게 눈이 내려앉은 가을날, 우리 둘은 어떤 언덕에 서 있었다. 그 답지 않게 장난기 가득하던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 곁에 털썩 앉던, 바옐. 며칠 사이 참 많은 일을 겪었던 우리가 아주 잠시였지만 행복하고 평온했던, 그런 날이었다. 나는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손으로 눈을 감싸고 돌아섰다. 그리고 점점 멀어지는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10년 만에 다시 들은 그의 연주는 내게 애틋했으나, 아쉬울 것은 없었다. 그의 음악은 처음부터 언제나 내 안에 살아 있다. 끝이 있되 영원한 그 음악은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그의 청중이 되길 소망한 누군가의 귀를 영원히 맴돌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옐은 다시 고요를 찾았고, 고요는 그의 청중으로 남았다. 같이 음악을 하는 사람이어서였을까, 아님 오랜 시간 같은 것을 겪은 우정 - 사랑의 힘일까? 이런저런 파란을 겪었음에도 그들은 결국 영혼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이제는 마음이 편안하다. 그들이 찾은 듯한 ’적당한‘ 거리를 보면서.


(생각해 볼거리)


1. 에단은 많은 음악가들이 활동하고 그 음악을 함께 누릴 줄 아는 사람들이 사는 음악의 도시입니다. 이처럼 내가 살고 싶은 도시가 있나요?


2. 등장 인물 중 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에 대한 나의 마음을 전해 보세요.

화요일 연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