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쪽) 우리 둘 모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존경하지요. 그의 명상록 가운데 한 부분을 기억하실 겁니다. “내 영혼아, 죄를 범하라. 스스로에게 죄를 범하고 폭력을 가하라. 그러나 네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나중에 너 자신을 존중하고 존경할 시간은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번, 단 한 번뿐이므로, 네 인생은 이제거의 끝나가는데 너는 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았고, 행복할 때도 마치 다른 사람의 영혼인 듯 취급했다……….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막막했다. 오랜 세월 동안 존경받는 고전문헌학 교수인 ‘문두스’ 그레고리우스가 그의 안정된 터전에서 걸어나와 리스본으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움이 앞섰다. 그레고리우스가 포르투갈 여인을 통해 알게 된 아마데우와의 만남에서 ‘어떤 영혼의 떨림’을 느꼈더라도 그가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탔을 때는 걱정이 앞섰다.
신기했다. 익숙한 베른을 벗어나 낯선 리스본에서 ‘언어의 연금술사’의 작가인 ‘아마데우 이나시오 드 알메이다 프라두’의 삶을 탐구하는 그의 여정이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연결고리를 만들어가는 것이, 그렇게 한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
(135쪽) "오빠는 이 방, 여기 책들을 정말 좋아했어요. '아드리아나, 난 정말 시간이 없구나. 책을 읽을 시간 말이다. 아무래도 사제가 될 걸 그랬나 보다' 이런 말을 자주 했어요. 그러면서도 병원은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늘 열려 있어야 한다고 했어요. 오빠가 지쳐 보여서 좀 쉬라고 하면 '아프거나 불안한 사람들은 기다릴 수 없단다' 언제나 이렇게 말했지요. 글을 읽고 쓰는 일은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 했어요. 아니, 어쩌면 읽고 쓰고 생각해야 한다는 느낌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는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불면증은 오빠에게 저주였다고 생각해요. 이런 괴로움, 한없이 숨차게 계속되던 단어를 향한 갈망이 아니었다면 오빠의 뇌는 훨씬 오랫동안 버텼을 거예요. 아직 살아 있을 수도 있겠지요. 살아 있다면 올해 12월 20일에 여든네 살이 되겠군요.“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선생님들조차도 그를 존경하게 만들 만큼 영민했던 아이, 그러나 판사인 아버지의 척추병을 생각하여 의사가 된 사람, 지독한 독재 치하를 살아가야 하는 포르투갈인으로서 겪은 갈등과 저항활동, 그 속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그의 사랑..... 많이 고민하고 많이 사유하며 살아간 아마데우의 삶을 추적하는 그레고리우스는 의외로 쉽게 그의 삶에 접근하게 된다.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우선은 ‘아마데우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 아닐까 싶다. 그들 곁에서 올바르게, 도덕적으로 살아가려고 깊이 사유하고 고민했던 아마데우의 삶을 잘 알려주고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그와 함께 했던 과거를 이야기하며 그를 추억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또 하나는 그레고리우스의 ‘일탈적인 떠남’이 그들의 마음을 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안정된 모든 것을 버리고 우연히 만난 책 한 권을 들고 떠나온 그레고리우스의 행동에서 사람들은 응원하고 싶은 ‘진실함’과 ‘절실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어쩌면 부러움일 수도 있겠지만. –특히 기차에서 만난 실우베이라의 경우에는.
(127쪽) 자기 삶과는 완전히 달랐고 자기와는 다른 논리를 지녔던 어떤 한 사람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일까. 이게 가능할까. 자기 시간이 새어나가고 있다는 자각과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호기심은 서로 어떻게 조화를 이룰까.
(537쪽) “그 뒤로 오빠는 더 이상 예전의 오빠가 아니었어요. 알아보지 못할 만큼 변했어요.” 아드리아나의 말이었다. 그녀는 서먹하게 낮설어진 오빠와는 더이상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려 했다. “이걸 가져가세요. 멀리, 아주 멀리."
사람의 정체성은 언제 유지되는가. 늘 그래왔던 그 모습일 때? 스스로를 바라보았을 때처럼? 아니면 들끓는 생각과 감정의 용암이 온갖 거짓과 가면과 자기기만을 묻어버릴 때 달라졌다고 불평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사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원하는 그 모습이 아니라는 뜻인가? 그러니까 타인의 안녕에 대한 걱정과 염려라는 가면을 썼을 뿐, 결국 익숙한 것이 흔들릴까봐 대항하는 투쟁문구의 일종인가?
아마데우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그레고리우스의 행동은 집착이다 싶을 만큼 세밀하다. 관련된 사람을 찾아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폐허가 된 학교에서 그의 체취를 느끼면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또 아마데우의 마지막 여행지인 피니스테레를 자동차를 빌려 무모하게 찾아가기도 한다. 작가는 ‘아마데우에 대한 이해’가 결국은 ‘그레고리우스 자신을 이해하고 찾아가는 방법’이라는 것을 이 집요한 행동을 통해 표현한 것 같다. 그러기에 읽다 보면 묘하게 아마데우와 그레고리우스의 모습이 비슷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특히 그레고리우스의 뇌에 이상이 생긴 것은 그러한 대표적인 상징이 아닐까?
(555쪽) 그레고리우스는 사진을 다시 훑어보고, 또 한 번 보았다. 과거가 그의 시선 아래에서 얼어붙기 시작했다. 기억은 과거를 고르고, 조절하고, 수정하고 속일 것이다. 기억 말고는 다른 근거가 없으므로, 누락과 비틀기와 거짓을 나중에 인식할 수 없다는 점이 소름 끼쳤다. 시내에서 보낸 평범한 수요일 오후, 그의 인생 한 조각. 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이슬람 지리학자 엘 이드리시가 세상의 끝에 대해 쓴 글. 그레고리우스는 엘 이드리시의 글을 라틴어와 그리스어와 헤브라이어로 번역했던 종이를 찾았다.
불현듯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났다. 베른을 찍자. 평생 살아온 곳을 붙들어놓자. 단순한 인생 무대 이상의 의미를 지녔던 건물과 골목과 광장들.... 가게에서 필름을 산 그레고리우스는 해가 질 때까지 어린 시절을 보냈고 지금도 살고 있는 랭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다양한 각도에서, 그리고 사진을 찍는 사람의 세심함으로 바라보자 거리가 아주 달라 보였다.
(중략)
필름 현상을 맡겼다. 그레고리우스는 부벤베르크 광장으로 가면서 뭔가 힘들고 거대한 사건으로 향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각상 앞에서 멈추어 섰다. 햇빛 대신 잿빛 하늘이 도시 위에 드리웠다. 그는 광장에 다시 발을 딛는다는 느낌이 들기를 바랐으나 그런 느낌은 오지 않았다. 그가 받는 느낌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얼마전 이곳에 섰을 때와도 달랐다. 피곤을 느낀 그는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이상이 있는 몸의 상태를 확인하고 치료하고자 베른으로 다시 돌아온 그레고리우스는 예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베른을 만나고 있다. 안정된 공간이었던 부벤베르크 광장도 같은 느낌이 아니다. 이제는 리스본으로 다시 떠난다 해도 걱정이 되지 않는 건 나도 책을 읽으며 그처럼 변화된 걸까? 소설일 거라 생각했던 이 책이 아마데우의 사유가 가득한 철학책으로 바뀐 것처럼.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고
이름 ( )
1. 그레고리우스처럼 어느 날 문득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나요? 이유는?
2. 그레고리우스의 일탈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이후 그레고리우스가 어디에서 살길 바라나요?
3. 이 책에는 아마데우의 독창적인 사유를 담은 문장이 많이 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문장을 적고 이유를 말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