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160쪽) 그날 이후 그녀가 그에게 바란 것은 자신의 힘으로 그를 쉬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애써 기울인 여러 배려들에도 불구하고, 결혼 후에도 그는 여전히 지쳐 보였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일로 바빴고, 어쩌다 집에 머물러 있는 시간에는 마치 여관에 든 여행자처럼 서름서름해 보였다. 특히 작업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그의 침묵은 고무처럼 질기고, 바위처럼 무거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녀가 간절히 쉬게 해주고 싶었던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열아홉 살에 집을 떠난 뒤 누구의 힘도 빌지 않고 서울 생활을 헤쳐 나온 자신의 뒷모습을, 지친 그를 통해 그저 비춰보았던 것뿐 아닐까.
자신의 애정을 확신하지 못한 것과 같이, 그가 그녀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역시 그녀는 확신한 적이 없었다. 그가 일상생활에 워낙 서투르기 때문에 그녀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이따금 느끼기는 했다. 그는 고지식해 보일 만큼 올곧은 성격의 사람이었고, 누구에게든 과장이나 아첨의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늘 친절했고, 한 번도 거친 말을 쓰지 않았으며, 이따금 존경을 담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나에게 과분해. 결혼 전에 그는 말한 적이 있었다. 당신의 선량함, 안정감, 침착함, 살아간다는 게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아 보이는 태도…………… 그런 게 감동을 줘. -
(196쪽)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기억이 그녀에게 있다. 아마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년 전 사월, 그러니까 그가 영혜의 비디오를 찍던 해의 봄에 그녀는 한 달 가까이 하혈을 했다. 피에 젖은 속옷을 빨 때마다 수개월 전 영혜의 손목에서 허공으로 솟구치던 선혈이 떠오르는 까닭을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병원에 가는 것이 두려워 하루하루 진찰을 미루며 그녀는 생각했다. 만일 나쁜 병이라면,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일 년. 육 개월. 아니면 삼 개월. 그때 그녀가 처음으로 생생하게 의식한 것은 그와 함께 살아온 긴 시간이었다. 기쁨과 자연스러움이 제거된 시간. 최선을 다한 인내와 배려만으로 이어진 시간. 바로 그녀 자신이 선택한 시간이었다.
마침내 지우를 낳은 산부인과로 향하던 오전, 그녀는 국철 왕십리역의 실외 승강장에 서서 유난히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후락한 철조 가건물들이 서 있었고, 차량이 다니지 않는 가장자리의 침목들 사이로 손질 안 된 풀들이 웃자라 있었다.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 전의 어린 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락한 가건물과 웃자란 풀들 앞에서 그녀는 단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떨림과 수치심을 숨기고 침대에 올랐을 때, 중년의 남자 의사는 차가운 복강경을 질 속 깊이 밀어 넣고는 질벽에 붙은 혀 같은 폴립을 떼어냈다. 날카로운 통증에 그녀는 몸을 뒤틀었다. 이것 때문에 출혈이 있었던 거군요. 깨끗이 떼어냈으니 며칠간 출혈이 더 심해졌다가 멎을 겁니다. 난소엔 이상이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순간 그녀는 뜻밖의 고통을 느꼈다. 살아야 할 시간이 다시 기한 없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이 조금도 기쁘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 한 달 동안 염려했던 큰 병의 가능성은 오히려 사소한 번민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돌아오는 길, 다시 왕십리역의 승강장에 섰을 때 그녀의 다리가 휘청거린 것은 방금 시술한 자리의 통증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침내 굉음과 함께 기차가 플랫폼으로 밀려 들어오자 그녀는 더듬더듬 철제 의자 뒤로 몸을 숨겼다. 그녀 안의 누군가가 자신을 그 단단한 차체 안으로 내던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191쪽) 왜, 죽으면 안 되는 거야.
그 질문에 그녀는 어떻게 대답해야 옳았을까. 그걸 대체 말이라고 하느냐고, 온 힘을 다해 화라도 냈어야 했을까.
오래전 그녀는 영혜와 함께 산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때 아홉 살이었던 영혜는 말했다. 우리, 그냥 돌아가지 말자. 그녀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금방 어두워질 텐데. 어서 길을 찾아야지. 시간이 훌쩍 흐른 뒤에야 그녀는 그때의 영혜를 이해했다. 아버지의 손찌검은 유독 영혜를 향한 것이었다. 영호야 맞은 만큼 동네 아이들을 패주고 다니는 녀석이었으니 괴로움이 덜했을 것이고, 그녀 자신은 지친 어머니 대신 술국을 끓여주는 맏딸이었으니 아버지도 알게 모르게 그녀에게만은 조심스러워했다. 온순하나 고지식해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던 영혜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고, 다만 그 모든 것을 뼛속까지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뼛속에 아무도 짐작 못 할 것들이 스며드는 것을. 해 질 녘이면 대문간에 혼자 나가 서 있던 영혜의 어린 뒷모습을. 결국 산 반대편 길로 내려가 집이 있는 소읍으로 나가는 경운기를 얻어 타고 그들은 저물녘의 낯선 길을 달렸다. 그녀는 안도했지만 영혜는 기뻐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저녁빛에 불타는 미루나무들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 저녁, 영혜의 말대로 그들이 영영 집을 떠났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
그날의 가족 모임에서, 아버지가 영혜의 뺨을 치기 전에 그녀가 더 세게 팔을 붙잡았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
영혜가 처음 제부를 인사시키려 데려왔을 때, 어쩐지 인상이 차가워 보여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육감대로 그 결혼을 그녀가 만류했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
그렇게 그녀는 영혜의 운명에 작용했을 변수들을 불러내는 일에 골몰할 때가 있었다. 동생의 삶에 놓인 바둑돌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헤아리는 일은 부질없었을뿐더러 가능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생각을 멈출 수는 없었다. 만일 그녀가 그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마침내 거기에 생각이 이를 때, 그녀의 머리는 둔중히 마비되곤 했다.
(104쪽) "힘들지 않았어?"
그때 그녀는 그를 보며 웃었다. 희미하지만 힘이 있는, 어떤 것도 거부하지 않으며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웃음이었다. 그제야 그는 처음 그녀가 시트 위에 엎드렸을 때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그것이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육체라는 모순, 그 모순에서 배어 나오는 기이한 덧없음, 단지 덧없음이 아닌, 힘이 있는 덧없음. 넓은 창으로 모래알처럼 부서져 내리는 햇빛과, 눈에 보이진 않으나 역시 모래알처럼 끊임없이 부서져 내리고 있는 육체의 아름다움...... 몇 마디로 형용할 수 없는 그 감정들이 동시에 밀려와, 지난 일 년간 집요하게 그를 괴롭혔던 성욕조차 누그러뜨렸던 것이었다.
(140쪽) 눈부신 조명 아래 그녀는 길게 드러누워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몸을 그녀의 몸 위에 겹쳤다. J의 몸과 그녀의 몸이 그랬듯이 지금 두 사람의 몸은 겹쳐진 꽃들 같을까. 꽃과 짐승과 인간의 뒤섞인 한 몸 같을까.
체위를 바꿀 때마다 그는 캠코더의 위치를 조정했다. J가 거부했던 후배위를 할 때는 먼저 엎드린 그녀의 엉덩이를 오래 클로즈업했다. 그가 뒤에서 삽입한 후로는 외부 모니터에 비친 영상을 직접 확인하며 섹스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려왔던 대로였다. 그녀의 몽고반점 위로 그의 붉은 꽃이 닫혔다 열리는 동작이 반복되었고, 그의 성기는 거대한 꽃술처럼 그녀의 몸속을 드나들었다. 그는 전율했다. 가장 추악하며,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의 끔찍한 결합이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그는 자신의 아랫도리를 물들이고 배와 허벅지까지 적시는 끈끈한 풀물의 푸른빛을 보았다. 마지막 체위는 그가 눕고 그녀가 그 위로 올라탔다. 역시 그녀의 몽고반점이 잡히도록 앵글을 잡았다.
(166쪽) 막을 수 없었을까. 두고두고 그녀는 의문했다. 그날 아버지의 손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칼을 막을 수 없었을까. 남편이 피 흘리는 영혜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간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정신병원에서 돌아온 영혜를 제부가 냉정히 버린 것을 말릴 수 없었을까. 그리고 남편이 영혜에게 저지른 일을, 이제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값싼 추문이 되어버린 그 일을 돌이킬 수 없었을까. 그렇게 모든 것이―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의 삶이 모래산처럼 허물어져 버린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204쪽) 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그 웃음의 끝에 그녀는 생각한다. 어떤 일이 지나간 뒤에라도, 그토록 끔찍한 일들을 겪은 뒤에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고, 몸을 씻고 살아간다. 때로는 소리 내어 웃기까지 한다. 아마 그도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 잊혔던 연민이 마치 졸음처럼 쓸쓸히 불러일으켜지기도 한다.
(219쪽) 이건 말이야. 그녀는 문득 입을 열어 영혜에게 속삭인다. 덜컹, 도로가 파인 자리를 지나며 차체가 흔들린다. 그녀는 두 손에 힘을 주어 영혜의 어깨를 붙든다.
어쩌면 꿈인지 몰라.
그녀는 고개를 수그린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영혜의 귓바퀴에 입을 바싹 대고 한 마디씩 말을 잇는다. 꿈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
그녀는 고개를 든다. 구급차는 축성산을 벗어나는 마지막 굽잇길을 달려 나가고 있다. 솔개로 보이는 검은 새가 먹구름장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이 보인다. 쏘는 듯한 여름 햇살이 눈을 찔러, 그녀의 시선은 그 날갯짓을 더 따라가지 못한다. 조용히, 그녀는 숨을 들이마신다.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그녀의 눈길은 어둡고 끈질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