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쪽) “린드아주머니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은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실망할 것도 없으니까.’라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한심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수없이 앤을 읽었다. 하지만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앤이 한 말을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앤이 한 말을 ‘듣기만 했을 때’와 그녀에게 들은 말을 ‘노트에 적었을 때’의 차이는 컸다. 그 차이만큼이 내겐 기적의 크기다. 나는 다시 실망하더라도 오래 꿈꿔왔던 것을 기대해 보기로 했다. 나는 ‘다시’ 소설을 쓰기로 했다. 나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안나 카레니나’와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파우스트’, ‘오만과 편견’ 같은 내 인생의 책들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결국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어쩌면 이것은 더 이상 기적을 믿지 않는 시대에 일어난 지극히 개인적인 기적에 관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190,191쪽) “아주머니 실컷 울게 해 주세요. 우는 게 그 아픔보다는 덜 괴로워요. 얼마 동안 제 방에 있어 주세요. 저 좀 안아주세요.”
추억이 기억과 다르다면, 그런 것 때문이리라. 추억 속엔 '나'아닌 '너'도 있다. 추억은 '우리'가 함께 만드는 것이다. 매튜를 잃은 앤은 마릴라의 가슴에 파묻혀 운다. 울고, 또 울면서 마릴라와 매튜에 대해 끝없이 말한다. 앤은 끊임없이 과거로 돌아간다. 앤은 아저씨와의 추억을 기억해 낸다. 결국 앤은 조금씩 마음을 추스르고, 아저씨가 자신에게 해주었을 말을 떠올린다. 비는 그칠 것이다. 눈은 잦아들고, 바람은 지나갈 것이다. 하늘에 떠 있는 별조차, 좌표를 바꾸며 끊임없이 변한다. 시간은 많은 것들을 바꾼다. 하지만 지금의 앤에게 슬픔을 참으라고 말하지 않겠다. 슬픔은 참아서 잊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이 약이란 말도 하지 않겠다. 아직 슬프다면 더 울어야 한다. 눈물이 더는 흐르지 않는 시간이 되면, 얼마간 담담해진 얼굴로 피어 있는 꽃도 보고, 반짝이는 달도 별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상처가 회복된다고 해도, 인간에겐 흔적이 남는다. 우리는 그것을 흉터라 말한다. 흉터를 안은 채, 죽지 않고 살아내는 것, 견디거나 버티는 것, 어쩌면 삶은 그런 것에 보다 가까울지 모른다. 상처가 꽃이 되는 순서를 믿는 건 어쩜 어른이 되어간다는 말일는지도..... 벚꽃이 바람에 비처럼 흩날린다.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나는 4월이다.
(299쪽) “난 최선을 다해 공부했고, 노력의 기쁨이란 어떤 것인지 그 뜻을 알게 된 것 같아. 열심히 노력해서 이기는 것 다음으로 좋은 것은 열심히 노력했으나 졌다는 것이야.”
한때 나는 노력이 의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늘 내 노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때마다 의지박약이란 말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하지만 이젠 노력이 일종의 '재능'이라는 걸 안다. 노력은 의지가 아니다. 노력이야말로 어떤 면에서 타고난 재능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특별한 재능 말이다.
(195쪽) 사람을 빠르게 치려다가 오타가 나면 삶이 된다. 인생도 그런 게 아닐까.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들은 실은 사람들이 수없이 내고 있는 오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288쪽) 나는 내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아! 사람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변하는 거구나!"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변하지 않아서 좋았다'는 말보단, '변해서 좋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어졌다. 평생 밥만 먹던 할머니가 죽기 몇 달 전 빵을 맛보면서 '아! 빵이 참 맛있구나'라고 말하는 장면이 그래서 나는 참 좋았다. 변했다는 건 뭔가 끊임없이 시도했다는 얘기일 거다. 발음이 괴상한 외국어 배우기를 시도하고, 낯선 나라의 음식을 먹어보고,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하기 위해 용기를 내보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