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내가 읽으려고 둔 건데 왜 여기 나와 있어?”
“필요하면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면 되잖아.”
“이건 내가 좋아하는 책인데 왜 내려놓았지?”
“다시 안 읽을 거잖아. 이번 기회에 그냥 정리하자고.”
책장을 정리하면서 벌어지는 남편과의 언쟁이다.
요즈음 우리는 책을 정리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쾌적한 집을 만들어보자고 이것저것 치우고 있는데 그중 가장 많이 쌓여 있는 것이 책이라서 며칠째 책장에 매달려 있다.
책을 정리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주로 내가 구입한 것들이라 정리할 책을 내가 책장에서 내려놓으면 남편이 처리하곤 했는데 책을 내려놓는 첫 단계부터 걸리는 것이 많았다. 이것은 손에 잘 잡히진 않지만 새 책이고, 이것은 내가 좋아하는 책인데 어쩌지? 망설이는 마음이 앞서니 책꽂이를 한 바퀴 훑었는데도 책이 그대로 있다. 이러다간 아무것도 안 되니 미련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은 간절한데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휴,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다음날은 마음을 좀 더 단단히 먹고 책장 앞에 섰다. ‘여행기’들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여행지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고, 그 역사를 배우며, 그곳에서 느끼는 작가만의 감성이 좋아 많이 읽는 분야이다. 하지만 오늘은 과감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소설’, 줄거리가 주는 재미보다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 깊이 있는 문장이 마음에 들었던 것을 제외하고 다 내려놓았다. ‘만화책’, 순정만화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친구가 선물한 것인데...... 내려놓자.
다음은 ‘그림 관련 책’이다. 이건 안 돼. 책을 읽으면 미술관에 있는 듯하니 반드시 다시 읽을 거야. ‘인문학, 철학’ 관련 책은 사색에 도움이 되니 안 되고, ‘수필집’도 다시 읽을 것 같으니 두어야 하고.... 또 한숨이 나긴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절반은 성공이다.
다음날, 책장이 휑하다. 무슨 일이지? 주변을 살펴보니 알라딘에 팔 책을 담아 놓은 쇼핑백에 내가 소장하려 한 책이 다 들어가 있다. 남편을 닦달하니 괜한 집착일 뿐이라며 그냥 처리하잔다. 집착, 집착이라니, 나만큼 집착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갑자기 자존심이 확 상했다.
사실 ‘집착하지 않는 것’은 내가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신조 중 하나이다. ‘집착’에는 나의 욕심, 기대가 들어가 있어서 그 욕심이 채워지지 않을 때 내가 받는 상처가 크고 그로 인해 나의 삶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나는 이 신조를 지키며 살아왔다. 특히 내가 집착하지 않으려 한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다. 나는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에게 나의 소망을 넣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생기면 기대감이 커지고 그 기대만큼 욕심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나의 기대와 욕심을 빼고 그 사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오히려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 덕분에 나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많이 맺고 있고 그러한 것이 나의 자랑이기도 했는데, 누구보다도 ‘쿨’한 나에게 ‘집착’이라니.....
“집착하지 않는다고? 그럼 지금 책을 쌓아두려는 이 모습은?”
남편의 빈정거림에 감정이 확 올라왔다. 그런데 잠시 심호흡을 하고 감정을 다스리며 다시 생각해 보니 지금 내 모습이 그리 ‘쿨’ 하지 않긴 하다. 나의 삶의 신조가 이렇게 상황에 따라 다르게 실천되고 있었나? 나는 이렇게 단편적인 존재였나? 씁쓸했다. 그래, 내가 그랬구나......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며칠간 정리한 결과 나는 500여 권의 책이 빠져나간 여유로운 방을 갖게 되었다. 그만큼 내 마음도 후련해졌고.
그런데 책을 정리하면서 티격태격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남편이 책을 분류하면서 책 속에서 이것저것 꺼내 놓았다. 책갈피로 쓰던 엽서, 사진, 책을 선물한 사람이 쓴 편지가 책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추억이 같이 떠올랐다. 한동안 그 추억에 빠져들어 그 시절을 이야기했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때로는 카드 영수증, 백화점 할인권도 꺼내 놓았다. 늘 책을 지니고 다녔기에 그 속에 나의 삶의 흔적들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 버리기 어려웠던 것 같다. 나의 시간이 거기 있어서, 나의 삶이 거기 있어서......
그래도 이젠 정리해야겠지?
책을 정리하고 비어 있는 책장에 공책 몇 권을 사서 꽂아 놓았다.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산 공책이다. 나의 여행 이야기, 나의 삶과 생각으로 그 공책을 채우고 싶다. 그것이 책꽂이에 꽂을 만큼의 가치는 지니지 못할지라도 지금은 써 보고 싶다. 그래서 편지나 책갈피 대신 나의 삶의 이야기를 책장에서 꺼내어 이야기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