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는 빈티지 가구와 흔들의자가 있었다. 그리고 80년대에 즐겨 들었던 LP가 있었다. 나는 흔들의자에 앉아 비틀스, 카펜터스, 변진섭의 노래를 들으며 책을 읽었고, 아이들은 레고를 조립했다. TV 소리가 사라진 거실에서 우리는 나른한 음악을 들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LP 작동이 서툰 아이들은 이를 능숙하게 다루는 부모의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고, 으쓱해진 우리는 오디오를 구입하고 LP판을 사 모으던 젊은 시절을 이야기했다. 아이들도 초등학교 때 배웠던 팝송을 흥얼거렸다.
여행의 즐거움에는 낯선 곳에서의 색다른 머묾도 들어 있다. 아침에 일어나 평소와는 다른 바깥 풍경을 맞이하고, 머무는 공간의 콘셉트에 맞추어 생활하면서 일상과는 다른 느낌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은 여행을 계획할 때 숙소에 가장 많은 정성을 쏟는다. 집과는 다른 특별한 공간에서 쉬는 것 자체가 힐링이기 때문이란다. 집주인의 독특한 생각을 담은 공간, 특별한 인테리어로 시선을 끄는 공간을 찾아 머물고 싶어 한다. 많은 시간을 보내는 숙소는 또 하나의 여행지이니 당연히 소홀히 할 수 없다고.
부산 여행을 계획하면서 아이들은 전망이 좋거나 예쁘지는 않지만 재미있는 숙소를 예약했다고 했다.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한 블록 들어와 자리한 그곳은 거실과 침실, 그리고 옥상의 묵직한 우드톤의 공간에 복고풍의 가구와 소품들을 비치하여 옛날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집주인은 ‘60-70년대의 아메리칸 하우스를 재현한 낡은 주택’을 짓고 방문객들이 색다른 경험을 하기 바란다고 자신의 집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곳은 그들의 의도대로 아날로그 생활 속에서 지난날을 추억하며 훈훈한 시간을 보내기에 적합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집 바깥의 모습도 옛날 풍경을 간직하고 있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전봇대와 얼키설키 얽힌 굵은 전깃줄이 창밖에 어지러이 펼쳐져 있었다. 때마침 비가 내렸다. 늘어진 전깃줄을 타고 빗방울이 또르르 굴러 내렸다. 문득 어릴 적 비 내리던 마당이 떠올랐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빨랫줄에서 동그랗게 미끄러지던 빗방울, 마루에서 찐 감자를 먹으며 그것을 지켜보던 시절, 문득 떠오르는 추억을 이야기하는 시간이 편안했다.
“왜 지난 이야기는 이렇게 편안하고 그립기만 할까?”
“지난 것이라 그런가? 이미 살아낸 것이니 더 애쓰지 않아도 되어서....”
“그리움은 행복했던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감정이라잖아. 지난 이야기 중 내가 행복했던 시간들을 골라 편집하여 기억하니까 그렇지 않을까? ”
친근감을 주는 공간이 상기시키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문득 궁금해졌다. 아이들이 왜 이런 숙소를 생각했을까.....
“레트로가 요즘 트렌드이기도 하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기도 했어. 왠지 편안할 거 같았고.....”
새로운 경험, 편안한 휴식.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이들은 여행의 의미를 우리와는 다른 것에서 찾는 것 같다. 아름다운 경치를 많이 보고 느끼고자 하는 우리와 달리 아이들은 숙소에서 오래 머물며 그 공간을 즐기곤 한다. 그 사이 남편과 나는 근처를 산책하며 ‘따로 또 같이’의 여행을 즐기기도 했지만, 점점 아이들의 여행방식에 동화되어가고 있다. 집과는 다른 공간이 만들어내는 색다른 분위기에 머물면서, 그곳에 마련된 특별한 것들을 즐기면서 가족들이 좀 더 가까워짐을 느끼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각자의 공간에 머물면서 각자의 생활을 하는데, 그곳에서는 공간을 함께 나누며 시간을 공유한다. 여행을 통해 가족이 친밀해지는 이 소중한 경험, 그 시간이 좋아 우리 가족은 또 다른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