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애 Feb 13. 2024

왜 삥을 뜯어?

“왜 친구에게 삥을 뜯어?”

“무슨 소리야? 내가 돈을 주었는데?”


이 어긋나는 대화는 카톡방에서 벌어진 일이다. 빨래를 널고 있는데 카톡이 계속 울렸다. 하던 일을 마치고 조금 늦게 카톡을 보았더니 100개가 넘는 대화가 이어진 후 통곡하는 이모티콘이 난무하고 있었다.


시작은 J의 ‘분노’라는 글이었다. J가 자신에게 많은 것을 의존하는 가족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 글이었다. 착한 딸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친정엄마에게, 함께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사를 온전히 J에게 맡기는 남편에게, 정서적으로는 거리를 두면서도 경제적으로는 의지하고 있는 자식에게, 그리고 돈을 벌어들이지 못하는 주식에까지 화가 난다는 내용이었다. 자신의 계획대로, 자신의 소망대로 흘러가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분노였다.

사실 J의 이런 상황은 오늘 특별히 생긴 것이 아니다. 그리고 J는 그동안 기꺼이 이 상황을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그럼에도 오늘 J가 특별히 화를 내는 것을 나는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럭저럭 무던하게 살던 사람도 어느 날 문득 내가 안고 있는 삶이 더 힘겹게 느껴질 때가 있고, 평소엔 기꺼이 감당하던 것들이 어느 때는 던져버리고 싶을 정로 버겁게 느껴지기도 하니까. J에겐 오늘이 그날이었던 것 같다.

J의 분노에서 시작한 카톡은 각자의 결핍을 이야기하며 신세 한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토닥이며 위로하고 싶었는데 이 침체된 분위기를 바꾸기는 쉽지 않을 듯했다.

‘그래, 돈만 한 것이 없지.’

고민하다가 인터넷 기능을 이용해 돈을 뿌리기로 했다. 그런데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인터넷을 검색하여 대충 읽고 작업에 들어갔다. 카톡으로 대화가 이어질 때 일을 처리해야 했기에 마음이 급했다. 송금 기능에 여러 가지 종류가 나오기에 4명에게 똑같이 나누어주는 것으로 보이는 ‘1/N로 정산하기’를 선택하였다. 20,000원을 투자하여 5,000원씩 골고루 나누어 주면 좋아하겠지 생각하며 호기롭게 돈을 뿌렸다. 그런데 ‘왜 삥을 뜯느냐’는 대답이 돌아온 것이다. 알고 보니 ‘1/N로 정산하기’는 네 명에게 똑같이 돈을 요구하는 것이란다. 즉, 4명이 다 나에게 5000원씩 보내야 하는 것이다.

큭큭.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다시 급하게 검색하여 ‘뿌리기’를 눌렀다. 이제는 만족할 거야. 그런데 여전히 불만이다. 내가 뿌린 돈을 친구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긴 한데, 5000원씩 균등하게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복불복으로 차등 지급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필 오늘 특히 우울한 J가 가장 적은 액수인 1,200원을 받은 것. 더구나 대화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친구에게 가장 많은 돈이 갔단다. 10분 이내에 그 친구가 받지 않으면 나에게 다시 돌아오는 것이라고.

실수 연발인데 자꾸 웃음이 나왔다. 시끌시끌한 대화방이 재미있어 10,000원을 더 쓰기로 했다. 이번에는 ‘사다리 타기’ 기능을 눌렀다. J에게 많이 가라고 생각하며. 그런데 이것도 돈을 요청하는 기능이란다. 사다리를 타서 나오는 액수만큼 나에게 보내야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J에게 가장 많은 돈이 배정되었다고. 오늘 자기는 뭘 해도 안 된다면서 J가 나에게 5,000원을 보내왔다. 큭큭. 결국 오늘 나는 J에게 삥을 뜯은 것이었다.

멋지게 위로하고 싶었는데 결과는 엉망진창이었다. 그러나 나의 실수로 우리는 웃으며 헤어질 수 있었으니 어설픈 위로는 되었으려나?

대화를 마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이후 카톡 대화를 차분히 읽어 보았다. 평범하고 무난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친구들임에도 다들 마음에 아쉬움을 갖고 살아가고 있으며 그것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변해가는 가족관계에서 과도기에 ‘낀 세대’인 50대의 우리가 느낄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부모님께 자식으로서의 책임을 다 하고 자식들 역시 헌신적으로 키워왔는데 아직도 그 책임은 지속되고 있고, 자식들에게 우리처럼 살 것을 요구하면 ‘꼰대’ 소리만이 돌아올 뿐인 현실, 끝까지 독립적으로 자신의 삶을 책임져야 함을 알고 그렇게 살아가리라 생각하고 있지만 가끔은 억울함이 느껴져 속상해하는 우리의 이야기였다. 처음부터 대화에 참여했더라면 나 역시도 눈물 이모티콘을 마구 날렸을 것 같았다.

오늘의 해프닝은 이렇게 끝났지만 앞으로도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내일 또 친구의 분노에 찬 마음을 마주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다행인 것은 ‘생명은 그 안에 결핍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을 다른 존재로부터 채워 받는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고달픈 삶 속에 나의 힘겹다는 푸념을 들어주는, 그리고 내 편이 되어 나를 위로해 주는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따뜻한 공감과 격려로 오늘의 힘겨움을 벗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나는 친구들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이 마음이 닿았으려나?

이전 05화 여행의 이유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