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탓만은 아닙니다

-시와 에세이 경계에서-

by 김휴

계절 탓만은 아닙니다

-시와 에세이 경계에서-


이제 겨울이 깊어갑니다.

나를 용서하기 힘든 시간이 또 돌아온 것 같습니다.

지난밤 깡깡 얼어버린 사유들은

내 빙하기가 끝나도 녹지 않을 모양입니다.


입을 꽉 다물고 있는 이 계절의 행태는

제 슬픔을 얼려 더 냉철해지려는 속셈일까요?


제 누드를 부끄럼 없이 보여주는 나무는

어느덧 나를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의식과 무의식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눈을 덮고 있는 풀포기도 이제 기력이 다했나 봅니다.

몸을 데울 한 줌 햇살마저 아쉬웠으므로


생이 심호흡 중입니다.


생각이 말라가면서 덩달아 나도 말라갑니다.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 한 잔, 뜨거운 기운이 손바닥으로 스며들 때

아득함으로 내 이름을 빠뜨립니다.

기억과 후회까지 뜨거움에 가라앉으면서 빨리 늙어가겠지만

아무도 눈치를 못 챕니다.


뜨거운 시차에서는

행방불명되기 좋은 이유가 너무 많습니다.


사소함이 목숨까지 담보하는 줄 몰랐습니다.

나는 꽃이 아니니까.

나는 인간이니까.

이렇게 무의미할 수는 없는 겁니다.


감성이 다 자라기 전에는

멀리 교회 종소리가 들리면 막 달려가고 싶었습니다.

막연한 그리움으로 나를 키웠는데도

지금은 느껴야 할 시선 하나 없는 것으로


내 이름조차 쓸쓸하게 느껴집니다.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다들 귀환하는 소설에서도

나는 이미 실종되었습니다.


글. 김휴

이전 13화독서 난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