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인근 가족 나들이
사람을 바나나에 비유하는 말이 있다. 겉은 노란색인데 속은 하얀 바나나.
미국화된 우리나라 사람을 일컫는 표현이다.
미국 이민 온 지 십 년이 넘은 딸. 벌써 바나나가 된 것인가.
우리나라 부모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자녀들의 교육 문제다.
꼰대라 인정하는 나뿐만이 아니라 젊은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아니 젊은 분들이 더 한 것 같다. 이곳 분당의 외국인 학교는 한국 학생들이 대부분이고 학교 옆 마트에서는 영어로 대화하는 모녀를 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딸은 외손주들에게 공부 잔소리를 하는 법이 없다. 저녁 후 디저트 겸 한 잔 하며 물었다.
"애들 공부는 좀 하나?" 이건 물음이라기보다는 공부 좀 시키라는 무언의 압박에 가깝다.
"때 되면 하겠지." 영 시큰둥한 반응이다.
딸 내외의 말을 요약하면 21세기다. 세계화, 디지털화에 인공지능까지. 젊은 딸 내외도 세상 변화를 예측할 수가 없단다. 무엇이 손주들에게 가장 좋은 것인지 보고 있다는 말이다. 잔소리보다는 여행, 체험 등을 통해 스스로 삶을 찾아가기를 바란다는 말.
말로 젊은 사람을 이길 방법이 없다. 타협점 찾기. 애들이 큰 꿈을 가질 수 있게 가족 나들이를 가자.
우리 세대가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큰 꿈인 대통령.
그런데 집 근처에 있는 대통령 기념관이 하필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 기념관이다.
대처 영국 수상과 함께 신자유주의 신봉자인 미국 40, 41대 대통령. 레이건!
노동 탄압의 주요 이론이 되는 신자유주의. 가장 진보적인 주인 캘리포니아에 가장 보수적인 레이건 대통령 기념관이라니! 약간의 논란 끝에 이곳에 기념관을 세웠다는 말. 미국은 그런 면에서는 관대한 편이다.
나는 사실 레이건 대통령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캘리포니아주 벤츄라 카운티 시미밸리에 자리한 레이건 도서관 박물관"
토요일! 휴일! 손주들과의 약속대로 주말 나들이.
집에서 한 시간 차를 달리면 LA 다운타운, 다시 405번 고속도로를 북쪽으로 40여분 가면 118번 도로를 만난다. 이름하여 레이건 프리웨이.
1시간 40분의 여행에 지루해하는 손주들과는 달리 모처럼의 장거리 드라이브에 나는 신이 났다.
하늘은 너무 맑고 구름도 멋진 모양을 갖추고 있다. 나도 모르게 추억의 노래 한 자락.
"그랜 캠벨의 타임"
"섬 피플 런, 섬 피를 크로우, 섬 피플 돈 이븐 무벳 올"
아직 경치 감상하기는 이른 손녀가 심심한 지 말을 붙인다.
"할아버지! 어떤 사람은 배워, 어떤 사람은 구름, 어떤 사람은 안 움직여. 이게 무슨 말이야?"
"어떤 사람은 달리고 어떤 사람은 기어가고 어떤 사람은 아예 움직이지도 않는다."
R과 L 발음 구분 못 하는 할애비의 영어를 이해하기엔 손녀가 너무 어리다.
문득 든 생각. 외손주들의 모국어는 영어? 한국어?
이 녀석들은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먼저 배운 말은 한국어다. 딸의 산후조리를 아내가 맡았다.
다음은 친할머니. 둘 째인 손자는 나와 아내가 함께 돌봤다. 당연히 그때 사용한 말은 우리말이다.
지금은 집 밖에 나가면 영어만 사용한다. 학교도 당연히 영어 사용.
사위가 우리말 잊지 않게 집에서는 영어 사용을 금지하지만 사위만 출근하면 남매는 영어만 사용한다.
이 녀석들은 바나나도 아니고 그냥 미국인들이다. 우리말은 대화는 가능하지만 (높임말이나 가족관계 말은 이해 불가) 한글은 깨치지 못했다.
손주들이 자라면 이렇게라도 한국어를 하는 게 큰 자산이 될 거란 생각을 해본다. 이름하여 K컬처 붐.
BTS와 케더헨이 대표적이라 하겠다.
레이건 프리웨이의 경치를 즐기다 보면 나타나는 멋진 건물 하나. 레이건 뮤지엄!
미국의 대통령 박물관 중에서 이곳의 경치가 가장 좋으며 관광객도 이곳이 제일 많다고 한다. 연 50만 명.
토요일인 오늘도 아침부터 서둘렀지만 주차장이 만원이다. 조금 늦었으면 길거리 주차를 할 번 했다.
대한민국 국민인 내게는 좀 생소한 느낌. 우리나라도 축복받으며 퇴임하고 존경받는 대통령이 나오기를 기대! 미국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이 없는 내게도 의미 있는 한 가지. 베를린 장벽 붕괴. 이곳에 우뚝 솟은 그 흔적이 너무 부럽다. 소지품 검사 심하게 하는 다른 미국의 관광지들과는 달리 별 조치가 없다. 입장권은 사위가 연 회원권을 구매. 딸과 함께 다니니 돈에 대한 정보가 나는 없다. 레이건 동상을 지나 휘장 같은 스티커를 왼쪽 가슴에 붙이고 안으로 들어가니 정말 잘 왔다는 느낌.
대한민국 국민인 나와는 달리 미국 시민들인 딸네 가족들 특히 초등학생인 손주들은 큰 꿈을 꿀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 아닌가 생각. 위인전처럼 일대기도 읽고 프롬프트를 통해 연설문 감상도 한다. 백악관 집무실 모형 구경도 하고 사진으로나마 대통령 취임식 흉내도 내본다. 인터넷에서 찾은 성인 1인당 30불의 입장료가 아깝지 않다는 느낌.
누가 뭐래도 이곳의 하이 라이트는 퇴임한 "에어 포스 원"이다. 이곳까지 이비행기를 어떻게 옮겨 왔을까?
분해를 했느니 어쨌느니 그건 다 이론이고 참 대단한 미국이란 생각.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대통령 전용기. 마국에 대한 호, 불호나 진영을 떠나 누구나 한 번쯤은 타보고 싶은 마음이지 않을까?
손 흔들며 사진 찍고 에어 포스 원 안으로! 설레는 마음으로 나는 백악관이란 비행기 감상.
영화의 소재로 곧잘 사용되는 미국의 모든 핵을 통제할 수 있는 컨트롤러가 든 핵가방에 섬찟한 기분.
그래도 부럽다. 남의 나라는 핵을 금기시하며 자기들은 항상 휴대하는 핵!
모든 나라의 핵을 없애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각국의 이해관계가 걸렸다면 우리 대통령 전용기에도 있었으면...
미 대통령과 연관이 있는 비행기와 각종 차들과 헬기 앞에서 손주들이 신나 하는 모습에 나도 흐뭇!
태극기를 배경으로 사진도 한 장. 대한민국의 국호가 사우스 코리아로 되어 있다. 리프브릭 옵 코리아로 해주었으면 하는 생각!
저녁 먹으러 한인촌 가는 길. 손주들에게 묻는다.
"대통령 되면 좋겠지?" 손녀의 답.
"싫어 골치 아파." 손자 왈.
"경찰 되고 싶어."
아직 어려서 그런가? 기대와는 전혀 다른 대답.
그래 너희 좋은 것 하고 사는 게 행복이다.
한인촌 들려 삼겹살이나 구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