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 예찬론
유행을 넘어 하나의 법률처럼 된 MBTI. 나의 MBTI는 INFP이다. 내향적인 성격의 대표주자로 손꼽히는 MBTI다. 어렸을 때부터 테스트를 아무리 해봐도 I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다. 나는 사람을 만나면 기가 빨리는 대문자 I 내향형 인간이다.
내향형 인간의 일상은 조용하다. 그러나 머릿속은 끊임없이 바쁘다. 우아한 백조의 발길질처럼 겉으로 보이는 것과 매우 다르다. 그러니 혼자 있어도 심심하지 않다. 주변의 인간들을 신경 쓸 틈이 없다. 옆집에 누가 사는 지 알 게 뭐람. 가끔 층간소음이 들려도 내가 나섰을 때 소모될 에너지를 생각하면 그냥 참고 살기로 한다. 아마 옆집도 자기 이웃이 무슨 짓을 하는 지 별로 관심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내향인의 일상에 강아지가 들어온다. 일주일에 한 번을 나갈까 말까 하는 집순이 내향인에게 적어도 하루 두 번은 산책을 나가야 하는 강아지의 등장은 매우 큰 변화다. 내향인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강아지의 눈망울을 바라보며 침을 삼킨다. 과연 우리 잘 지낼 수 있을까?
목줄을 들기만 해도 신나서 펄쩍펄쩍 뛰는 녀석을 겨우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나가자마자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는 이웃을 마주친다. 내 강아지와 베스트 프렌드의 보호자였다. 둘 다 덩치도 비슷하고 나이도 비슷해서 만날 때마다 즐겁게 노는 사이다. 하루에 몇 번을 만나도 반갑게 얼싸안고 주둥이를 맞추며 신나게 뒹군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자마자 저 멀리서 큰 소리로 나를 부르는 또 다른 이웃이 보인다. 오며가며 마주칠 때마다 강아지를 예뻐하시던 아저씨였다. 마침 잘 됐다며 간식을 사주라고 카드를 쥐어주신다. 인사 치레로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등장한 카드에 나는 손사레를 친다. 그러나 결국 이기지 못하고 편의점으로 들어가 대충 아무거나 하나 사 들고 나온다. 아저씨는 내 손에 들린 간식을 보더니 이거 가지고 되겠냐며 똑같은 간식을 한 상자 째로 사들고 나와 내 손에 안기고 떠난다.
얼떨결에 간식 부자가 된 강아지는 기분이 좋다. 공원을 나가는 길에 위치한 세차장도 놓칠 수 없다. 맡겨놨는지 당당하게 들어가 간식을 달라고 애교를 부린다. 민망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에 항상 인사는 꾸벅꾸벅 하고 나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들러야 하는 곳이 있다. 이제는 알아서 단골 카페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일부러 강아지를 주려고 간식을 구비해두는 사장님 덕에 외향형 강아지는 기분이 항상 좋다. 신나게 재주를 부리고 간식을 먹고, 자신을 예뻐해주는 손님들의 쓰다듬을 받는다. 어쩜 이렇게 얌전하고 예쁘냐는 칭찬을 들을 때마다 집에서 펄쩍펄쩍 뛰는 모습이 생각나 배신감을 느낀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강아지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사람이라면 무조건 들이대는 강아지 때문에 나는 어느 정도의 눈치를 익혀야 했다. 멀리서부터 사람이 다가온다면 일단 내 옆에 바짝 강아지를 붙인다. 사람이 지나가면 그제야 바짝 붙인 줄을 살짝 풀어주고 간식을 준다. 아무에게나 들이대지 말라는 나의 신호인데 잘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카페 역시 마찬가지다. 요즘엔 강아지가 예쁘다고 함부로 만지지 말라는 에티켓이 널리 퍼져 있어서 내 강아지에게도 잘 다가오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예쁘다고 애정을 담아 쳐다봐주시는데, 내 강아지는 그렇게 쳐다보기만 할거면 빨리 만져달라며 짖는 편이다. 물론 사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게 깜짝 놀라는 짖음이 될 수 있으니 그 전에 미리 말한다. 강아지랑 인사 좀 해주실래요?
강아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강아지가 먼저 다가와 주었다는 사실만으로 쉽게 마음이 녹는 편이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화기애애하게 변하고 강아지도 만족하고 나도 만족할 수 있다. 내향인의 성격으로는 절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외향형 강아지와 함께라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사람의 본성은 결코 변하지 않지만 살아가는 방법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환경에 적응하듯이 가면을 바꿔 쓰는 것이다. 우리에겐 이미 여러 가지 사회적 가면이 있다. 그 가면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한 동네에 모여 사는게 갈등이 일어나는 건 필연적이다. 보다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가면을 쓰며 상대하는 것은 오히려 생활의 지혜라고 생각한다.
내향인인 나에게 다가온 외향형 강아지 무강이는 나에게 새로운 가면을 선물한 셈이다. 더 다양한 세상에서 부러지지 않고 유연하게 생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다주었다. 무강이가 아니었다면 동네에 친하게 지내는 이웃은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사는 내내 이방인의 역할에만 머물면서 방관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재고 있었겠지. 무강이 덕분에 나는 사람들과 함께 녹아내릴 수 있었고 어울릴 수 있었다. 더 많은 추억과 인연을 쌓아가며 풍성한 인생을 만들고 있다. 내향형 인간이 외향형 강아지를 만났을 때, 인생은 더욱 풍요로워진다. 그러니 모두, 강아지 기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