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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호 Dec 27. 2023

착한 일을 하면 좋아질거야

저주에서 벗어나는 방법

  눈이 오고 길이 얼었던 날, 매우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집에 가는 속도를 높였다. 빙판길은 넘어지기 쉽다. 나는 조심성이 없어서 매우 자주 넘어지기 때문에 빙판길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다. 반질반질 얼어붙은 길에 넘어지면 멍이 3주는 갔다. 나이가 들수록 멍은 더 오래갔다. 그래서 나는 이제 어떤 추위에도 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는다. 사람이 많은 출근길 지하철에서 걸을 때는 핸드폰을 보지 않는다. 반드시 지키는 원칙 중 하나였다.    

  

자동문을 열고 엘리베이터로 직행하려는 순간 발이 쭉 미끄러졌다. 대리석 바닥엔 갈색의 무언가가 어지럽게 흩뿌려져 있었다. 작은 파편들뿐이었지만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똥이다. 

추운 겨울은 냄새까지 얼려버린다. 내가 밟은 파편도 냄새는 얼어 있었지만 제형이나 색깔 등이 똥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혹시 몰라 코를 가까이 들이대보니 나는 똥이라는 존재감을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집으로 올라가는 동안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냥 둘까? 치울까?

개를 키우기 전의 나라면 그냥 두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내가 한 짓도 아니고, 오히려 나도 똥을 밟은 피해자라는 입장이었고, 나서서 치운다고 뭘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개를 키우고 나자 이런 일을 그냥 두고 보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건물 내 똥 투척(?) 사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여름날, 건물 게시판에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개 키우는 사람 지옥에나 가라’



처음 보고 너무 충격적이었던...�


코팅된 종이에 볼펜을 꾹꾹 여러 번 갈겨 쓴 정성이 돋보이는 메시지였다. 그 사람 역시 개똥을 밟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산책을 하러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급하게 닦아낸 갈색 얼룩과 채 가시지 않은 냄새를 목격한 적이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똥을 밟았고, 욕을 하면서 신발을 닦고 바닥을 닦았겠지. 자신의 피해를 어떻게든 알리고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경고의 마음을 담아 그런 문구를 눌러 썼을 것이다. 그 때의 나는 내가 한 짓이 아니니 신경 쓸 필요 없다며 그 말을 무시했다. 하지만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이 내 개에게 지옥에나 가라는 저주를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살면서 이웃을 만나는 순간이 많지는 않지만 그 많지 않은 순간마저 견디기 힘든 때가 있다. 입마개를 하라는 소리는 예사다. 더 힘든 건 개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가끔은 못 볼걸 봤다는 듯 등을 돌려버리기도 한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걱정하는 그 모습이 더욱 긴장감을 자아냈다. 1분도 안 되는 시간이 길게 느껴질 정도로 아득했던 순간이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죄인으로 긴장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1층의 똥이 우리집 개의 짓이 아니라는 사실은 확실하지만 또 다시 지옥에 가라는 저주를 듣고 싶지도 않았다. 분명히 다른 개의 짓일테지만 우리 개의 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잘못이 없어도 오해는 쌓인다. 쌓인 오해는 갈등을 낳는다. 갈등은 피하고 싶었다.      


물티슈와 휴지를 들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쭈그리고 앉아서 바닥을 살펴보니 생각보다 많은 부분에 똥이 흩어져 있었다. 사람들이 밟은 흔적대로 바닥에 눌어붙기도 했다. 작은 부분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가져간 물티슈와 휴지가 다 동났지만 바닥은 완벽히 깨끗해지진 않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사람들이 밟을 일은 없겠다 싶었다.      


똥을 치우는 동안 몇몇 사람들이 내 옆을 지나갔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만 기다렸다. 이 사람들에게 내 개똥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냥 보냈다. 굳이 없는 말을 보태는 것 같았다. 변명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누군가는 나의 착한 일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남의 개똥을 치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내 개똥을 치울 때도 눈살이 찌푸려지는데 남의 개똥은 오죽하겠는가? 게다가 갓 싼 따끈한 온기가 없이, 차가운 냉기가 감도는 똥은 그 촉감도 더럽다.      


인생사 부메랑이라고, 악한 일도 돌아오지만 착한 일도 돌아온다는 진리가 나에게도 맞아 떨어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더 이상 우리 개에게 지옥에나 가라는 저주가 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사람만 보면 꼬리를 흔드는 녀석에게 지옥에나 가라는 말은 너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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