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것은 거리를 줄이는 일

by 깡통로봇

흰 빨래가 깃발처럼 나부끼는 아침이었으면 좋겠다.

사막을 건너온 낙타의 느긋한 되새김질 같은 오후였으면 좋겠다.

오래된 건축물이 품고 있는 사연 깊은 냄새가 들려오는 저녁이었으면 좋겠다.


새 물건 들일 자리로 치워진 공간에

햇살만 팔랑거리며 바람 따라 드나들었으면 좋겠다.

오늘의 일과를 마치고 펼쳐놓은 일기장에

적을 것을 찾지 못하다가

‘내일 적지 뭐’하고 아쉽게 덮는 것이

나의 일이었으면 좋겠다.


걷는 것은 거리를 줄이는 일이다.

출발에서는 멀었지만,

모래에 묻히지 않기 위해 낙타는 발바닥을 넓혔다.

들고 온 색 바랜 깃발에 담긴 환한 햇살들

흘러가는 강 물결 위로 가마우지들이 떼 지어

물결을 거슬러 타고 오르며 끼룩거린다.

문 열고 들어서면 오래 지켜온 건물 안에는

활자 굵게 새긴 미소 담은 돌탑들,

그림자 따라 돌아보는 걸음이 애틋하다.


바람을 기다리는 것은 설레는 기분

당 단풍나무 씨앗들은 회전 날개를 만들어 떠날 채비를 마쳤다.

속도를 줄여 멀리 가려는 씨앗들에 뺏긴 마음은

상승기류 타고 앉아 날갯짓하지 않는 새처럼

한 석 달 열흘 둥둥 흘러갔으면 좋겠다.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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