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어서인지, 희망을 일부 내려놓아서인지 언제부터 마음속에서 결핍감이 별로 작동하지 않는다.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정신적으로 대단한 여유를 주기는 하는데 대신 열정이라고도 할 감정도 함께 줄었다는 단점이 있다.
있어도 좋지만 없어도 그닥 불편하지 않고, 되었으면 좋겠지만 되지 않아도 크게 상심하지 않는 마음은 감정의 동요를 없애 주지만 나른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소중하게 품에 안고 꿈을 꾸었네
작고 따뜻한 꿈
버릴 수 없는 애처로운 꿈
너의 꿈은 때로 무거운 짐이 되지
괴로워도 벗어둘 수 없는 굴레
너의 꿈은 때로 비교할 데 없는 위안
외로워도 다시 한번 걷게 해주는
간절하게 원한다면 모두 이뤄질 거라 말하지 마
마치 나의 꿈은 꿈이 아닌 것처럼
- 김윤아의 “꿈” 중에서
(2023.06.14~15 남해)
남해 다랭이마을에 와서 저녁 식사를 위해 마을 안에 있는 식당을 찾아 들어간다.
멸치쌈밥과 해물파전을 시키고 해물칼국수나 톳멍게비빔밥 중 무엇을 시킬까 논의하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콩국수가 지금 맛있다고 적극 권하신다. 당연히 권하는 데로 콩국수를 시킨다. (이렇게 권하는 것에 약하다. 장을 보러 가서도 판매하는 분이 권하면 여러 종류 중에서 그냥 그 물건을 사게 된다.)
아주머니가 여간 친절하고 다정하신 게 아니다.
반찬을 내주시면서 지금 가지가 아주 맛이 있다고 하시며 듬뿍 담은 접시를 내려놓으신다. 얼른 한 젓가락 들어 먹어보니 정말 맛이 좋다. 다른 반찬들도 손맛이 예사롭지 않다.
멸치쌈밥을 처음 먹어보는 아이들도 호응이 매우 좋고 잇따라 나온 콩국수는 권한 이유가 단번에 이해가 될 정도로 담백하고도 고소한 맛이 우리 모두의 찬사를 불러일으킨다.
친절하고도 손맛 좋으신 아주머니 덕에 맛있고도 기분 좋은 저녁 식사가 되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아직 어둑해지기까지는 조금 시간 남아, 바다를 접하고 있는 마을 아래쪽을 간단하게 산책할 요량으로 좁은 내리막길을 따라 걸어 내려가는데 마을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돌무덤이 눈에 확 들어온다. 부정함을 경계하는 금줄을 걸어 놓은 것이 당산나무에서와 같은 신령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사람들의 기원을 담아내는 조형물임을 짐작하고 안내판을 보니 밥무덤이라 한다.
밥무덤은 마을 중앙과 동, 서쪽 3군데에 있는데 매년 음력 10월 15일 저녁 8시경에 주민들이 모여 중앙에서 동제를 지내고 나서 제사에 올린 밥을 묻는 구덩이이다. 가천마을 밥무덤은 마을 중앙에 3층탑 모양의 밥무덤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고 동서 쪽에 있는 돌담 벽에 감실을 만들어 밥무덤으로 쓰고 있다.
밥을 묻을 때에는 밥을 정갈한 한지에 서너 겹으로 싸서 정성껏 묻고 흙으로 덮은 다음 그 위에 반반한 덮개돌을 덮어둔다. 이는 제물로 넣은 밥을 쥐, 고양이, 개 등의 짐승이 해치면 불길한 일이 생기거나 신에게 받친 밥의 효력이 없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논이 적어 벼농사가 어려운 남해지역에서는 쌀밥은 생명을 유지해 주는 귀한 주식이기 때문에 예부터 무척 귀한 것으로 여겼다. 이에 따라 귀한 제물인 밥을 땅속에 넣는 것은 마을을 지켜주는 모든 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풍요를 점지해 주는 땅의 신 즉 지모신에게 밥을 드림으로써 그 기운이 땅속에 스며들어 풍요를 되돌려 받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있다.
당산제나 동제를 지내는 곳은 많이 봤지만 밥무덤은 낯설다.
찾아보니 남해와 사천 등의 일부 지역에서만 밥무덤제를 지낸다고 한다. 논이 적어 쌀이 귀하다 보니 쌀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신앙으로까지 변해 전승되는 것이다.
다랭이논은 매우 빼어난 조형적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보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넓고 평평한 땅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곳에서 벼농사를 지을 땅을 만들기 위해 경사진 땅에 돌로 축대를 쌓으면서 켜켜이 쌓아 올린 층층 논들은 보는 이들에게 감탄을 자아내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런데 다랭이논이 주는 그런 조형적 아름다움에 빠져 그 논을 만들고 유지해 가는 사람들의 삶의 고단함은 잠시 뒤로 놓고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부끄럼이 올라온다.
아래로 내려가니 향내 나는 식물들을 키우는 농가를 지나는 길이 향기로 가득 차 있다. 수국이 만개하여 탐스런 꽃 봉오리들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어느 사이 사위가 어둑해져 해안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의 철썩거림만 제 소리를 높인다.
같은 길인데도 어두울 때 걸은 길과 아침에 걷는 길은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아침 길은 반짝반짝 빛이 난다. 공기에서도 밝고 산뜻함이 느껴진다.
데이지꽃이 향연을 펼친 길을 따라 바다를 끼고 나 있는 길을 따라 걸어간다.
이어지는 바래길의 한 코스로 조성된 길은 풍경이 줄 수 있는 아름다움과 여유로움을 한없이 펼쳐준다. 멀리 둘러싼 산들과 그 아래로 이어져 내려오는 다랭이 논들, 그리고 그 끝에서 만나는 바다. 이 풍요로운 아름다움을 정자에 앉아 오랜 시간 마음껏 누려본다.
아래서 올려다보는 다랭이 논을 떠받치는 돌들은 생각보다 크고 높다. 그래서 다랭이마을을 위에서 바라보며 느끼는 조형적 아름다움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만날 수 있다. 위에서는 작은 논들이 연달아 이어지는 계단 같은 모습이라면 올려다보는 논은 돌의 무게감과 높이감으로 인해 웅장함을 느끼게 한다.
그 돌들의 무게를 감당하고 쌓아갔던 사람들의 간절함이 생생하게 다가와 새삼 가슴에 여러 감정이 섞인 뭉클함을 느끼게 한다.
논 사잇길을 따라 위로 올라가다 보니 모내기를 준비하며 부지런히 모를 옮겨놓는 작은 트랙터소리가 요란하다. 남부지방이라 그런지 모내기가 좀 늦은 듯하다.
저 모들이 가뭄도 홍수도 태풍도 만나면서 바닷바람을 이기고 가을에는 누렇게 익어 농부들에게 귀한 쌀을 가져다줄 것이다. 그리고 그 결실물이 풍요로움으로 이어지면 좋으련만.
산업화 시기에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 시행된 저곡가 정책으로 인해 농촌이 파탄 지경에 이른 것도 벌써 너무 오랜 전부터의 이야기가 되었지만, 아직도 쌀농사는 농민들의 최소한의 생산비도 보장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있고, 쌀 소비가 줄어 과잉생산을 우려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돌을 쌓아 올리며 논을 만들어내는 그 간절한 소망들이 이루어지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보여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농민들의 요구를 담아내기 턱없이 부족한 양곡관리법 개정안(쌀 수요 대비 초과생산량이 3~5% 이상이거나 쌀값 하락 폭이 지난해 대비 5~8% 이상이면 정부가 쌀을 의무적으로 매입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법) 조차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재의결에서 부결된 상황이 되었으니 말이다.
걸어 올라오다 보니 어제저녁을 먹은 식당 앞을 지나게 된다. 식당 아주머니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걸어가는데, 식당 앞길에 아주 조그만 고양이 세 마리가 서로 장난을 치며 놀고 있다. 평온하다는 느낌, 그냥 미소 짓게 만드는 행복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