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바위보 할아버지의 초등학교 앞 성추행 사건
어린 시절 많이 읽었던 전래동화 해님과 달님.
떡을 팔아 두 아이와 근근이 먹고살던 한 어머니가 떡을 모두 팔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호랑이를 만난다. 배고픈 호랑이는 어머니에게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는 제안을 하고 어머니는 떡을 하나씩 주며 잡아먹힐 위기를 넘긴다. 하지만 호랑이에게 줄 떡이 바닥나자 호랑이의 먹이가 된다.
처음부터 불안한 약속이었지만 희망을 가지고 지켜보던 아이들은 한 번의 약속이 깨졌을 때부터 슬픈 어머니의 결말을 확신하며 괴로워한다.
믿을 수 없는 존재와
힘의 불균형으로 만들어진
평등하지 못한 규칙의
협박에 의한 동의
이런 일은 현실에서도 일어난다.
초등학교 수업을 갔다가 가위바위보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었다.
학교 앞에서 하교하는 여자아이들의 길을 가로막고 가위바위보 놀이를 하자며 접근한 할아버지가 있었다.
3판을 해서 모두 이기면 그냥 보내주지만 한판이라도 지면 옷 속의 몸을 만지게 해 줘야 갈 수 있다는 규칙의 놀이였다.
규칙을 듣고 어른들은 이 어이없고 불공평하며 성추행 요소가 뻔히 보이는 규칙의 놀이를 아이들이 했겠냐고 말했지만 몇몇 아이들은 이 놀이를 했고 놀이를 경험 한 아이 중에는 세 번 모두 이겨서 안전하게 집에 돌아왔다는 자랑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4학년 수업에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자 아이들은 1, 2 학년 아이들이 분명 피해자일 것이라고 말하며 그때 주변에 5, 6학년들은 뭘 했냐며 정말 나쁜 형들이라고 분노했다. 그 모습을 봤다면 자기는 가만히 있지 않고 신고했을 것이라고, 아이들을 구해줬을 것이라고 말하는 아이의 눈은 정의감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이들을 만나다 보면 학년에 따라 보이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고학년 아이들은 게임의 규칙이 공평하지 않거나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생각되면 조정이 필요하다고 말하거나 내가 손해라며 안 한다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저학년으로 갈수록 게임을 제안하는 권위자에게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말하기보다는 그 게임 안에서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자신이 승자만 될 수 있다면 어떤 규칙을 갖고 있는 게임인지는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불만이 있다 하더라도 문제가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성격, 상황, 경험 등의 다양한 변수를 바탕으로 아이들이 반응하는 것이라서 개인차가 크다. 그래서 고학년과 저학년의 특징은 이렇다! 하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학년을 떠나서 상황을 판단하는 것이 어려운 아이들이 있다는 것은 배움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증거가 된다.
가위바위보 할아버지가 나타나면 절대 가위바위보를 하면 안 돼. 신고해.
설마 이 문장을 아이에게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가? 당신이 이런 형태의 성폭력 예방 교육과 훈련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를 바란다.
가위바위보 할머니는 괜찮다는 얘긴가? 가위바위보 한번 하고 안마해주기 게임은 괜찮은가?
근시안적으로 한 가지 사건에 대한 대처 방법을 알려주는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아이들은 응용력이 어른처럼 좋지 않다. 그래서 원칙을 알려주고 다양한 변수에 어떻게 반응할지 연습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원칙을 알기 위해서는 성폭력 상황이 아닌 놀이 상황으로 들어가서 시작해야 한다.
놀이의 원칙,
1. 동의: 규칙은 변형될 수 있다 하지만 놀이하는 이들의 동의가 필요하다.
2. 선택의 자유: 놀이를 하다가 규칙이 변형되면 놀이를 그만둘 수 있다.
3. 자기표현의 자유: 놀이를 하다가 불편한 감정이 생기면 놀이하는 아이들에게 폭력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다.
4. 감정의 자유와 존중: 놀다 아프면 울 수 있다.
5. 보호와 안전: 놀다 다친 아이가 생기면 바로 멈추고 실수여도 사과한다.
6. 자기 결정권의 존중: 협박이나 조종으로 놀이에 참여시킬 수 없다.
7. 힘의 균형: 한 사람이 원하는 놀이만 하지 않는다.
8. 기여와 협력, 의리: 자기편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죽은 팀원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다.
9. 신뢰와 공정함: 모두의 합의에 의해 세워진 규칙은 공유하며 지킨다
이밖에도 많다. 이것은 놀이에서 삶의 가치와 사람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선을 배운다. 위의 내용이 성교육과 상관없어 보인다면 관점을 확장하려는 노력이 더 필요하다. 연인 사이, 친구, 가족, 학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성폭력 사건의 대부분은 동의, 자유, 존중, 보호와 안전, 힘의 균형, 성적 자기 결정권, 신뢰, 자기표현의 부재에서 발생한다.
그러면 학교 수업시간에 이런 접근이 가능할까? 시간 부족과 체계화되지 않은 인성 교육 구조는 통찰이 있는 성교육의 진행을 어렵게 만든다.
1. 시간 부족
40분 안에 아이들과 관계 형성을 하고 할아버지 사건 이야기와 대처 방법만 말하기도 빠듯하다.
각 학년별로 얘기해야 하는 주제들이 있는데 '성'이라는 주제에 포커스를 맞춰서 말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2. 교육 과정 설계의 한계
성교육시간에 놀이와 연결된 내용을 하면 '성'얘기를 더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왜냐하면 놀이는 인성교육 주제와 연결되는 부분이라 인성교육 시간에 하면 되고 지금은 성 관련 얘기가 더 많이 다뤄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선생님들을 탓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성, 민주시민, 학교폭력, 인권, 장애인 인식개선 등 다양한 주제로 특강이 진행되고 각 주제별로 다른 강사, 전문가가 들어오기 때문에 내용이 겹치면 안 된다. 그래서 그 주제에 맞는 얘기를 딱! 해줘야 그물이 고기를 잡듯 학습의 구멍 없이 모든 것을 알차게 배울 수 있다.
인성과 폭력, 인권,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세, 약자를 대하는 태도 등은 모두 성교육과 연결되어 있는 주제다. 그런데 이것을 강의하는 사람들은 그전에 어떤 수업을 했는지 알지 못하고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 정해진 학습 목표에 따라 강의를 진행한다.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은 각각의 주제를 연결해서 이해한 내용을 삶에 적용하면 된다. 결국 가장 어려운 부분은 아이들의 몫이다.
힘과 권력에 대해 얘기하고 사회와 관계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배운 후에 성폭력을 얘기하면 자연스러울 텐데 아쉽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지난 시간에 어떤 것을 배웠는지 강사들끼리 얘기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는데 여기 들어가는 강사들은 서로 다른 단체 소속 강사들이기 때문에 대화를 하기 어렵다. 그럼 그냥 성폭력을 얘기하면서 권력과 힘, 위계, 구조를 얘기해주면 되지 않냐고 묻는다면? 위에서 말한 1번, 시간이 없다. 도돌이표 같은 이 대화를 계속하는 동안 인성이라는 큰 주제의 수업은 조각난 특강이 됐다.
방법은 있다. 학교에서 전체 과정의 흐름을 기획하고 과정을 개발한 후 강사에게 요청하는 것이다. 앞에서는 뭘 배웠고 뒤에서는 어떤 수업이 들어갈 것이니 연결해서 진행해 달라고 요청하면 여러 선수들이 계주를 하듯 바통을 넘겨주며 흐름을 잃지 않고 연결해 줄 수 있다. 그럼 담임 선생님들은 교과목 수업(국어, 영어, 수학, 사회, 역사, 과학 등)을 진행하면서 과거에 배운 내용들을 연결해주면 된다. 학교들 중에는 위의 방법으로 진행하고 있는 학교가 있을 수 있고 담임 선생님들 중에는 전체 과정을 혼자 힘으로 기획하고 진행하는 분도 계실 것이다. 아직 내가 만나보지 못했을 수 있고 전체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나에게 설명을 안 해주셨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는 지금까지 성교육을 하면서 내 앞에 어떤 수업이 있었는지 내가 가고 나면 어떤 수업을 진행하게 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다.
인생은 맥락이다. 삶은 수많은 점들이 선으로 연결되고 선이 만든 면들로 구성된 입체적인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볼 때는 입체적으로 봐야 한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인생을 점으로 배운다. 삶이라는 맥락에서 빠져나와 점이 된 성교육이 다시 삶과 연결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