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무진 꿈의 허점
이상형을 말해봐!
[남자 이상형]
요리 잘하는 여자, 날씬하고 예쁜 여자, 게임 잘하는 여자, 긴 머리 여자, 친절한 여자, 좋아하는 음식이 같은 여자, 안 때리는 여자, 힘이 약한 여자(여자아이들의 등짝 스매싱에 진저리가 난단다), 우리 엄마 같은 여자ㅡㅡ;;;;(어떤 엄마랑 살길래...)
[여자 이상형]
돈 많은 남자, 한강이 보이는 집을 가진 남자(정말 디테일해서 놀랐다. 다른 강은 안되고 반드시 한강이어야 하는 이유는 서울 집값이 가장 높기 때문이란다.) 근육이 있는 남자, 복근이 예쁜 남자, 185cm 넘는 남자, 힘이 센 남자, 내 말 잘 듣는 남자, 요리 잘하는 남자, 취미가 같은 남자,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남자, 아이돌 같은 남자, 유머 있는 남자, 공부 잘하는 남자, 수학 잘하는 남자 등
초등학교 6학년 연애라는 주제로 진행되는 수업에서 아이들은 미디어와 어른들, 자신이 만든 여성과 남성의 틀 안에서 최고를 찾느라 바빴다.
이성에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는 6학년 교실에서는 간혹 사랑을 하고 있거나 사랑했던 경험이 있는 아이들을 만나기도 한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연애를 해보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들도 있다.
'조그만 것들이 무슨 연애냐, 걔들이 사랑을 아냐, 그냥 남사친, 여사친 보다 조금 더 친한 사이지 뭐.'
이렇게 아이들의 사랑을 과소평가하며 웃어넘기는 부모들도 많지만 사랑을 얘기하는 아이들은 아주 진지하다. 그리고 과거 실패한 사랑에 대해 얘기할 때는 가슴에 손을 얹고 눈도 마주치지 못하면서 아파했다.
사랑을 하고 있던, 하고 싶던, 했었던 경험과 상관없이 이상형을 얘기하는 시간은 신나고 즐거운 시간이다. 쉴 새 없이 내가 원하고 상상하는 이성의 모습을 얘기하는 아이들은 이미 그 이상형을 만난 것 같은 표정을 하며 행복해했다.
더 이상 추가할 것이 없다며 이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을 만나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는 얘기를 할 즈음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위의 모든 것을 가진 남자, 여자가 있어.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한대.
그런데, 그 사람이 네 친구들하고 만나는 것을 싫어해. 나는 친구들과의 모임에 나갈 수 없어.
나는 둘 이하는 여행을 좋아하는데 상대방은 여행에 자꾸 친구들을 불러.
좋아하는 음식 취향이 같아서 함께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이 즐거워. 하지만 장보고 요리하고 치우고 집을 청소하는 것은 모두 너의 일이야. 그것이 여자의 일이거든.
노래와 춤을 좋아해서 친구들과 노느라 매일 밤늦게 들어와.
근육 있고 힘도 센데 화나면 물건을 부시고 날 때려.
내 말을 잘 들어 그래서 자꾸 전화해서 펜 하나 사는 것도 물어봐.
게임을 좋아하고 나랑 게임 취향도 같아 그래서 매일 새벽까지 게임 해. 새벽 게임 때문에 학교나 회사에서 힘들어하고 주말에는 먹지도 않고 씻지도 않고 자지도 않아.
여행을 좋아하는데 계획하고 예약하는 건 싫어해서 늘 내가 혼자 알아서 해야 해. 그런데 네가 일정을 짜 놓으면 마음에 안 든다고 화를 내. 여행만 가면 싸우고 와.
몸 관리를 위해서 닭가슴살만 먹어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은 불가능해. 게다가 운동을 3시간 넘게 해서 저녁에 영화 한 편도 같이 보기 힘들어
유머러스하고 재미있어 그래서 친구가 많고 날 만나는 시간에도 계속 전화벨이 울려.
이런 얘기가 나오면 아이들은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내 이상형에서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무엇인지, 내가 원했던 이상형과의 행복한 삶이 어떻게 지옥으로 변할 수 있는지, 첫눈에 반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왜 첫사랑에 성공하는 것이 기적 같은 일인지. 그리고 13년 넘게 산 우리 부모님은 아직도 그렇게 싸우는지에 대해 객관적으로 관찰하게 된다.
이상형에서 빠진 부분을 발견했는가? 그것은 바로 존중과 배려, 조율이다.
상대는 나와 다르다. 그래서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끌렸던 부분도 있다. 세상에 나와 100% 같은 생각과 감정을 가진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은 늘 아쉽고 답답한 부분이다. 사랑하는데 조금만 변해주면 좋을 것 같고 이 정도도 배려하지 못하면서 왜 나와 함께하는지 의문이 생긴다. 그 생각이 쌓이고 쌓이면 '혼자 살지 왜 결혼했어?'라는 생각까지 들게 된다. 그렇게 믿고 사랑했던 사람들은 서로의 지옥이 된다.
13살이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아니다. 어른들도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고 나 또한 모르고 결혼했으며 지금도 그 점을 순간순간 잊고 분노한다.
사랑은 상대를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는 사람, 내가 원하는 것과 상대가 바라는 것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는 사람. 사랑한다는 이유로 희생을 강요하고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서로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 줄 수 있을 지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 갈등이 생기지 않는 무조건적인 양보가 아니라 갈등이 존재할 때 그것을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풀어가는 방법을 아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상대 뿐 아니라 '나는 그런 사람인가'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한 사람의 인생, 그 안에 숨겨진 가치와 삶의 태도를 마주하는 것이 사랑이란 것을 알기에 13살이란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느껴지는가. 배의 초콜릿 근육도 한강이 보이는 집도 맛집 투어를 함께하는 경험도 나의 사랑을 지켜주지 못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하는 동안 아이들은 진지해졌고 장난기 어린 눈빛들은 더없이 깊어졌다.
진짜 사랑을 바라보는 눈이 생기면 가짜 사랑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랑을 얘기하기에 어린 나이란 없다. 사랑을 얘기하기 어려워하는 어른이 있을 뿐이다. 40년을 넘게 산 나도 찐 사랑을 잘 모르겠다. 그래서 아이들과 수업을 하며 하나씩 찾고 있고 삶과 사랑의 정수를 발견할 때마다 아이들과 함께 비명을 지른다.
꺄아~
늙는다는 것은 몸이 노화하고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이 아니라 발견과 환호를 잃는다는 것이다. 당신 삶에서 수없이 많은 발견과 환호가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가짜 사랑에 흔들리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