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어린이집을 가고 싶지 않다고 우는 아이를 업고, 안고, 당기며 어린이집에 등원을 시키고 나면 늘 아슬아슬하게 회사에 도착하고는 했다.
월요일 아침은 더 괴롭고 끔찍하다. 잠자는 아이를 업고 한 손엔 내 가방, 다른 한 손에는 이불 가방과 신발을 들고는 그렇게 ㄱ자 허리를 하고는 집을 나섰다.
그 당시 나 혼자 발을 동동거리며 살았던 이유는 남편의 도움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편은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육아에 집중하기를 바라는 상태였고 자신의 도움이 더해지면 일을 더 오래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지 등원에는 관심이 없었다. 물론 하원도.
남편은 자신이 불리하다고 생각될 때 늘 꺼내는 카드가 있다. 그것은 내가 아이를 등원시키면서 아이에게 했던 행동에 대한 얘기다.
너는 뭐 잘난 줄 알아? 예전에 박시 등원시킬 때 짜증 내면서 애를 발로 차더라.
그날도 남편은 10년 전 하루의 얘기를 꺼냈고 내가 그럴 리가 없다고 얘기했지만 결국은 죄책감에 목소리가 작아지기 시작했다. 난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아이를 발로 찼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아이가 큰 잘못을 했을 때 손바닥 한 번을 때리지 않았고 말로라도 아이를 아프게 할까 봐 단어 선택에도 신중을 기하는 내가 어린이집 다니는 작은 아이를 발로 차서 멀리 날아가게 했단다. 게다가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낮다고 생각해 왔던 남편이 그런 얘기를 하니 더 수치스러웠다.
'내가 정말 아이를 찼다고? 내가? 그런데 기억도 못해? 와... 진짜 난 엄마도 아니야.'라며 나를 비난하는 내 안의 심판자와 10년을 살았다.
내가 그랬을 리 없어. 난 그런 행동 안 해.
'아니, 내가 봤다니까?' 라며 10년 전 얘기를 또 꺼내는 남편. 그날은 내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더 이상 고개를 숙이지도 변명하지도 않았다. 대신 옆에 앉은 6학년 박시의 눈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박시야. 엄마가 너 어린이집 다닐 때 등원하면서 빨리 가라고 엉덩이를 발로 찼대. 그런데 기억이 안 나...'
'엄마 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응... 그렇지만 만약에 엄마가 그랬다면 정말 미안해.'
'엄마, 괜찮아. 내가 용서해줄게.'
남편은 이 대화를 말없이 지켜봤다. 그리고 그 후로 다시는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기억나지 않는다며 나의 행동을 덮지 않았고 얼마나 짜증이 났으면 그랬겠냐고 합리화하지 않았다. 당신이 돕지 않아서 그럴 수밖에 없었지 않았냐며 핑계 대지도 않았다. 믿을 수 없는 얘기였지만 거짓말하지 말라고 무시하지도 않았다.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했고 아이는 기억나지 않는 일이지만 마음을 다해 미안하다고 얘기하는 엄마를 용서해줬다. 아이들은 용서를 참 잘한다. 그래서 어른인 나는 부끄럽고 고맙다.
어리다는 이유로 나의 죄책감을 뒤집어 씌우며 합리화하지 말고,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덮어버리지 말고, 눈을 보며 사과하면 내 안에서 떠들어대는 소리들을 꺼버릴 수 있다. 그리고 주변에서 자신의 허물이나 죄책감을 감추기 위해 비난하는 이들의 입을 닥치게 할 수 있다.
감정코칭 수업에서 자신이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상상 속으로 초대해서 대화하는 활동이 있었다. 부모가 모두 떠나 곁에 없었던 나는 살아있는 부모를 상상의 장에 초대하는 이들이 이상해 보였다. 돌아가신 분들이 아닌데 왜 상상으로 초대하냐고, 직접 가서 나 아팠다고 얘기하면 되지 않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상담사는 상대방과 얘기하면 더 상처 받을 수 있으니 안전한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난 그 말이 쉽게 이해가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른 뒤. 시댁에서 있었던 일을 통해 그 의미를 알게 됐다. 가족들과 추석 음식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가정폭력에 관련된 얘기를 하게 됐다. 20대가 된 조카는 자신의 청소년 시기에 엄마한테 맞은 이야기를 하며
엄마 왜 그렇게 날 때렸어? 그때 정말 아팠어...
라며 그날을 회상했다. 그러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엄마가 얘기한다. '네가 맞을 짓을 했지. 똑바로 했어봐. 그렇게 두드려 맞았겠니?'
'많이 아팠니? 미안해... 그때는 엄마가 잘 몰랐어. 네가 세상이 말하는 바른 길을 걷게 하고 싶었거든. 그러려면 때리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어. 지금은 후회가 돼'라는 얘기는 현실에서는 듣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래서 상담사는 엄마 인형을 앞에 세워두고 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직접 해주라고 말했나 보다.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는 엄마에게도 쉽지 않은 선택이다. 하지만 만약 용기를 낸다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내가 과거의 아픈 순간으로 타임머신을 타지 않도록 도울 수 있다.
상대가 나 때문에 아팠다고 얘기하는 것을 들으면 그 고통의 책임이 모두 나에게 있다고 비난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면 나는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방어 시스템을 가동하기 때문에 상처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얘기를 시작하는 것은 아프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듣고 싶은 것보다 나의 고통을 한번 봐달라는 것일 수도 있다.
길을 걷다가 아이가 돌에 걸려 넘어졌다.
아이는 무릎의 피를 보고 울기 시작한다.
엄마가 달려와 얘기한다.
이 돌봐. 여기 걸려서 넘어진 거야. 앞을 잘 보고 걸어야지!
아이는 다시 울기 시작한다.
엄마 잘못이야. 손을 잡고 걸었어야 하는데. 미안해
아이는 계속 운다.
나쁜 돌, 우리 아기를 아프게 하다니. 때찌해주자!
아이의 울음은 계속된다.
엄마는 아이를 꼭 안고 무릎을 보며 얘기한다.
많이 아프지, 아프겠다.
아이는 계속 운다.
갑자기 넘어져서 놀랐어?
계속 운다.
아직도 많이 아프구나. 눈물이 계속 나네. 어디가 가장 아파? 마음이야, 무릎이야?
마음도 아파? 아! 초콜릿을 떨어뜨렸네. 그래서 속도 상했구나... 무릎은 괜찮아?
그래 이제 괜찮아... 다행이다.
걸을 때는 앞을 잘 봐야 해. 돌이 있을 수도 있거든. 이게 그 돌이야. 하지만 앞을 잘 보고 걸어도 넘어질 때가 있단다. 그때 눈물이 나면 울면 돼. 그러다가 힘이 생기면 일어나서 약 바르고 다시 걸으면돼.
미안해라는 말이 필요하지 않을 때도 있다. 넘어진 나와 함께 있어주며 하소연을 들어주는 한 사람이 더 절실할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