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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희 Apr 23. 2021

오늘은 망했어!

망할 하루를 보낸 이에게 보내는 글

친구 초대의 날이었다.

6살 아이는 친구를 초대하고 1주일 전부터 오늘만을 기다렸다.


낮 1시 낮잠시간이 되기 전 엄마가 아닌 친구의 손을 잡고 하원 하는 아이의 발걸음은 봄날에 날리는 꽃씨들보다 가벼워 보였다. 하지만 가벼운 발걸음의 의미가 친구를 만난 기쁨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집에 와서 알게 됐다.


'오늘은 초콜릿, 아이스크림, 솜사탕을 먹을 거예요. 그리고 옥토넛, 티니 핑, 시크릿 쥬쥬도 볼 거예요.'

그냥 친구 집에 놀러 온 것이 신나서 하는 말인 줄 알았지 그것을 정말 다하고 가겠다는 말인지 몰랐다.


그런데 정말 얼초(초콜릿을 녹여서 틀에 붓고 냉장고에 넣어서 만드는 초콜릿)를 만들어 먹고는 바로 보석바를 빼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은비, 오늘 은비 집에서 금지된 거 하러 율이네 온 거 아냐? 수상한데.

네! 금지된 거 하러 왔죠! 집에서는 엄마가 단거 못 먹게 해요. 나 오늘 이거 다 먹고 갈 거예요.

으아~ 안돼~~ 엄마가 이 사실을 아시면 율이가 초대할 때마다 걱정하고 고민하실 텐데...

엄마한텐 비밀이에요.

지금 바로 아이스크림 먹는 건 안돼.

그럼 조금 있다 먹을게요. 만화 보자!

만화가 끝나고 시작된 놀이에서는 '만지마! 내 거야! 내가 먼저 할 거야!'라는 예민해진 아이들의 볼멘소리가 들렸다. 그러다가 조용해서 가보면 둘이 머리를 맞대고 일을 꾸미고 있었다.


여기 올라 갈 생각은 어떻게 한건지ㅜㅜ


오후 6시가 다 돼서 은비는 집에 가고 혼자 남은 율은 급 피곤해져서 2시간이나 저녁잠을 잤다. 그리고 8시쯤 눈 뜬 아이에게 은비의 이야기를 전했다.





율아 은비가 오늘 정말 즐거웠대. 행복했대.




얘기를 들은 율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왜... 갑자기 은비 생각하니까 보고 싶어?

응. 보고 싶어...



저녁을 먹던 중2 아들이 말했다.




이제 은비는 안 오는 거야? 싸웠다며.





응, 싸웠어. 그런데 화해했나 봐. 율아 오늘은 어떤 날이 었어? 재미있는 날이었어 아니면 화나는 날이었어?

기대되기도 하고, 화나기도 하고, 짜증도 나고, 슬프기도 하고, 재미있는 것도 있는 날이었지.



하루를 성취목표로 바라본다면 성공과 실패로 나눌 수밖에 없다. 오늘은 최고였어와 오늘은 최악의 날이었어로 바라보는 하루가 쌓이면 결국 내 인생도 두 가지 잣대로 바라보게 된다.



내 인생은 접혔어.
내 결혼은 망했어.
내 학창 시절은 끔찍했어.



내 인생 어느 부분은 맘에 안들 수 있고 내 결혼의 한 부분이 아팠을 수 있지만 그것을 인생과 결혼, 학창 시절 전체로 가져오지는 말아야 한다. 힘든 순간 사이사이 따뜻했고 눈물 나는 사이사이 기쁨이 존재했을 것이다. 삶은 한 가지 감정으로 이뤄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목표를 분명히 하고 달성하기 위해 애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노력하는 과정에서 느끼고 배운 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나 스스로 관계를, 삶을 접어버리는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인생은 성취 목표가 아니라 성장 목표를 추구할 때 행복해진다.


친구를 기다리며 기대했고, 나와 의견이 다른 친구를 보고 화가 났고, 내가 존중받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짜증이 났고, 친구에게 양보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후회되고 슬펐으며, 평소에는 못하는 것을 함께 해준 친구가 있어서 재미있는 날이었지라고 말할 수 있는 어른이 됐으면 좋겠다.


늦게까지 집안일을 하고 11시 반이 돼서야 잠자리에 누우며

'아! 짜증 나. 오늘은 너무 힘든 날이었어!'

라고 혼잣말하는 내게 아이가 묻는다.





오늘은 뿌듯하고, 힘들고, 짜증 나고, 서운한 날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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