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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연 Jul 03. 2024

단편소설 <소년차장>(1952)

영화사가 노만 13

1952년 12월 발간된 서울고등학교·서대문중학교 교지  《경희》 4집(서울고등학교, 1952)에 수록된 노만의 '소품'(小品) 단편소설 <소년차장 (少年車掌)>을 여기에 소개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작품은 노만이 고등학교 2학년 문예반 활동 시절 창작한 작품 중 하나다. 교지  《경희》 4집 전문은 서울고총동창회 홈페이지(seoulgo.net) 회지란에서 PDF 스캔본으로 열람할 수 있었다. (https://seoulgo.net/cmnt/37613/boardInfo.do?bidx=567640)

서울고등학교 교지 《경희》4집 표지(좌)와 노만의 단편소설 <소년차장>(우). ⓒ 서울고총동문회 홈페이지


소년차장 (少年車掌)

노 만 길


  황혼이 어둠으로 변해 버린지도 오래다.

  불이 어둠침침한 거리에 때때로 자동차의 '헤뜨라이트'가 비치며 지나가는 때, 시청 앞 뻐스 정류장에는 초조히 뻐스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뻐스가 한 대 멎었다. 뻐스 안은 이미 손님이 가득차 있다. 앞 뒷문에는 서로 먼저 타려고 밀며 매다리는 혼잡을 이루어놓고 있다.

  뒷문 차장인 소녀는 쨍쨍이 울리는 목소리로 탈 곳이 없으니 다음 차를 타라는 것이다. 앞문에서는 십삼사세 된 소년차장이 한 사람이라도 더 태우려는 듯이 가운데는 비었으니 닥아 서 달라고 하며 연방 손님을 올린다. 차 뒤에서 쿠락숀 소리가 나며 '오라잍' 하는 쨍쨍한 예의 소녀의 목소리가 나자 소년차장은 문을 닫으며 역시 '오라잍' 하고는 자리를 잡고 선다. 뻐스는 서면을 향해 달린다.

  "홀애비가 돈을 해서는 뭘 하갔나, 술이나 먹구 근심 걱정이나 다 잊어 버리구, 에이 되는 대루 살아 가야디"

  "님자, 말을 어떻게 하나, 원 그런 마음일랑 아예 먹디두 말게, 그래두 한 번 만날 날이 있갔디, 그러니깐 오래 살두룩이나 해 보세가네"

  뻐스 앞문 옆에 사십은 잘 됐음직한 두 사람이 술이 얼근히 취해 가지고 그 독특한 평안도 사투리를 쓰며 자기네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이번 후퇴때 가족을 버리고 단신으로 월남해 온 평안도 어느 바닷가 사람 같았다. 검은 살결을 보아도……

  "둥주 오마니(중주 어머니) 보단두(보담도) 고 똘똘한 둥주를 죽일걸 생각하문 밥이 다 안넘어가데. 난 다시 고런 아(애)는 못나 볼 것 같애……"

  "님자 오늘 너무 취했네게, 와(왜) 그런 소리만 자꾸하구 앉았나, 꾹 참구 몇 달만 더 기다려 보세가네. 그땐 끝당이 나갔디…"

  "에이 이제 이만큼 기다렸으문 넉넉하디, 난 더 기다려 보구푼 마음두 없구 실증이 났네. 님자나 더 기다려 보게나. 이제는 난 성(화) 밖기 안나네게"

   모든게 귀찮은 듯 한 대답이다. "님자 덩말 취했네. 어서 '하꼬방'으루 가서 한잠 잘 자야갔네"

   이때 뻐스는 벌써 부산역전에 온 모양으로 내리고 오는 사람의 물결에 두 사람은 밀리어 잠간 말을 뚝 끈치고 잠자코 있다. 문 밖에서는 소년차장이 서면간다고 손님을 끄는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들린다. 오분가량 되도 뒤 뻐스는 고장인지 오지 않고 뻐스는 그냥 서서 손님을 더 태운다.

   차 안에서는 여기저기 불평이 쏟아지기 시작하며 어서 가자고 재촉이 심하다. 그래도 운전수는 들었는지 말았는지 그냥 있고 여전히 밖에서는 서면 간다는 소리만이 높다. 차 안은 전보다 더 자리가 좁아지며 숨이 칵 막힐 지경이다. 또 어서 가자는 재촉 소리가 높아간다. 소년은

   "네 곧 가겠읍니더" 하고는 또 서면 간다고 외치면서 가운데는 비었으니 가운데로 닥아 서라고 손님이 오를 때 마다 입버릇처럼 그런다. 이제는 가자는 재촉이 있는 한편 욕을 퍼붓는 사람도 있다.

   한편구석에 노동자 비슷이 차림새를 한 한 청년이 처음에는 가만이 앉아있더니 화를 벌컥 내며 어서 가자고 큰소리로 호령한다. 이 사람의 핏대 올린 소리가 여러 번 계속한 뒤에야 겨우 차는 떠났다.

   어린 놈이 돈만 안다고 한심스러운 듯 한 말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온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아직도 화가 안풀려 여전히 욕을 퍼붓는다. 아까 핏대 올리던 청년은 써근거리며 있더니 분한 듯한 소리로

  "이새끼야 세상에 돈이문 데일인줄 아니… 네 누깔(눈)에는 자리가 비인 것 같으니 개새끼야"

하며 소년차장의 멱살을 잡고 때릿듯이 분해서인지 오른손이 부르르 떤다. 차 안 여기저기서는 그놈 한 번 혼을 내주어야 한다고 떠든다. 그래도 소년차장은 악에 받친 듯 한 목소리로

  "그래 이 세상에 돈이 제일 앙인교오"

하며 자기가 잘했다는 듯이 자기가 잘 안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다.

   차 안은 갑짜기 분한 듯 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며 떠들석해지는 가운데

   "무어야 무엇이 어째"

하면서 청년은 "철썩" 하는 소리가 나게 소년차장을 기어이 때리고야 만다. 울음소리가 터지면서 자기가 잘 했다고 여전히 악을 쓴다. 차 안에서는 고놈 맹랑한 놈이라고 욕이 퍼 들어온다.

  "그래 이놈! 돈이 제일이야!" 하며 아직도 화가 안풀려… 오히려 더 치밀어 연방 오른손을 휘두른다. 말리려고하는 사람들은 커녕 오히려 잘한다고 하는 소리만이 들려온다.

   아까 평안도 사투리를 쓰던 사람이 술 취한 김에 장난쪼로 차장 애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후려갈긴다. "이쌔끼 돈이믄 델이야?"

  "그래 돈이 제일 안인교"

  좁은 까닭으로 돌아서지는 못하고 경상도 액센트와 다른 이상한 억양으로 한층 더 발악한다.

  이번에는 더 세찬 청년의 주먹 소리가 나며 소년차장의 울음은 더욱 높아간다. 맞는 소리가 계속해 나며 반항하는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온다. 그때야 비로소 옆에서 말리는 사람도 몇이 있었다.

  "애들과 무얼 그럴 것 있오. 그만 참으시오" 이런 점잖게 말리는 사람이 있어 겨우 그 소년차장을 코피를 씻을 여유가 있었다. 코피는 사정없이 흘러 내린다. 때리던 청년은 본척도 않고 돌아서 버리고 만다. 아까 뒤통수를 때린 그 사람은 더 손을 대지 못하고 그저 주춤하고 서있다가 자꾸 흐르는 코피를 보고 안되었는지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소년차장에 주며 정면으로 돌아서는 차장의 머리를 뉘이고 코를 막아준다.

   정신없이 울던 소년차장은 자기 코를 막아주는 사람을 말끄럼이 쳐다 보더니 갑짜기 "앗"하고 놀라며 그 사람에게 와락 달겨들어 두 팔로 힘껏 안는다.

   "둥주야…"

   "아바지…… 흐응흙…… 엉… 엉…"

   아까와는 전연 다른 눈물이 코피와 섞이어 둥주 아버지의 가슴팍을 적신다. (고2 서울) ■



(교지 《경희》  4집, 서울고등학교, 1952, 74~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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