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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연 Jul 04. 2024

단편소설 <수건>(1954) ①

영화사가 노만 14

서울중고등학교 교지 《경희》 5집 (1954) ⓒ 한상언영화연구소 소장

1954년 3월 발간된 서울중고등학교 교지 《경희》 5집(서울고등학교, 1954)에 수록된 노만의 단편소설 <수건>을 나누어 소개한다. 이 단편소설은 노만이 서울고등학교 3학년 졸업반 재학 시절에 문예반 활동을 통해 창작한 작품 중 하나다. 여기에는 소년 시절 그가 부산 피난지에서 목도했던 전쟁의 아픔과 쓸쓸함이 담겨있다.

교지 《경희》 5집은 올해(2024년) 초 한상언영화연구소를 통해 수집되어 현재 충남 천안 '책방 노마만리'에서 열리고 있는 '노만의 한국영화사 발간 60주년 기념' 기획전시에서 전시 중에 있다. 4집과 마찬가지로 5집 역시 교지 전문을 서울고총동창회 홈페이지(seoulgo.net) 회지란에서 PDF 스캔본으로 열람할 수 있다. (https://seoulgo.net/cmnt/37613/boardInfo.do?bidx=567641)

교지의 말미에 수록된 '편집후기'(124쪽)에는 노만의 소감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봄 기운도, 이제 우리 피부의 감촉을 새롭게 어르만진다. 자, 귀여운 이 《경희》다섯째 아들을 안고 들로 산으로 새 불꽃을 찾으며, 가자. (로만)"



수건

노 만 길

  아침 '그'는 가벼운 기분으로, 먼지를 퍼붓는 바람을 정면으로 받어 가며 보수동 골목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는 골목이었다. 아늑한 잠이 들었다. '그'는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후 심호흡을 해본다. 가슴이 한결 더 가벼워 진다. 유달리 높푸른 하늘이라 생각하며 어떤 정열이 용솟음 침을 느낀다.

  사범학교로 가는 큰길에 들어섰다. 바람이 또 불었다. 먼지는 많었으나 역시 씨원한 바람이었다. 상쾌했다. '그'는 다시 발끝을 드려다보며 생각에 잠긴다. 아무래도 서울의 가족들이 미심적었다. 소문엔 굶어죽느니 어쩌느니 할 때마다 가슴이 뭉클하던게, 어제 밤 꿈엔 동생이 마구 울며 그렇게 좋던 얼굴이 앙상한 뼈만 들어나 앓고 있는 모양이 보였다. 생각해서 그런 꿈을 꾼 게라고 손자 위로해 봤으나 가슴이 묵직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꾸 동생의 얼굴이 눈에 아른거렸다. 죽지나 않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새 한숨을 푸 내쉬었다.

  "언제 오셨어요"

  '그'는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아 언제 오셨읍니까."

  '그'는 의외의 놀라운 사실 -- 그리 놀라운 사실도 아니건만 -- 에, 무의식중에, 묻는말 그대로 반문하며 몸을 돌렸다.

  "벌써 오랬어요. 한말은 훨신 더 됐어요. 가족들도 무사하세요?"

소녀는 무척 반가운듯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그'를 쳐다봤다.

  "아니, 저 혼잡니다."

'그'도 반가웠으나 무표정하게 풀없이 대답했다.

  "어마나, 그럼 혼자 오셨어요?"

소녀는 눈을 크게 뜨며, 혼자 온게 무슨 큰일이나 난 것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백희씨네 가족은 모두 무고하신가요, 반갑습니다. 정말 백희씨가 오셨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읍니다."

백희가 놀라는걸 보고 '그'는 그제서야 겨우 인사를 했다.

  "어떻게 가족들은 못나오셨어요, 저인 이십칠일날 아침에 추럭으로 그냥 나갔어요. 원체 갑짜기 떠나기 때문에 인사여쭐 틈도 없었어요."

  "그러셨겠지오. 저도 그날밤 용산에 심부름 갔었다가, 이틑날 아침에 들어가려고하니 벌써 늦었더군요, 할 수 없이 혼자 뛰쳐 나왔읍니다."

  "그럼 가족 소식은 도무지 모르시겠군요."

  "소식이 다 뭡니까......"

  "그럼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백희는 '그'가 혼자 지내는 게 궁금했던지 말머리를 돌렸다.

  "혼자 밥이야 뭐 굶겠읍니까"

  "그래도 고생이죠"

  "........."

  "근데 아침 일찍 어델 가세요"

백희는 '그'가 작업복에 작업모를 쓴 게 어울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저......"

'그'는 우물쭈물하며, 당황한 빛을 띄었다.

  "목욕가던 길예요."

백희는 '그'가 당황하는 빛을 보고 안됐던지 자기가 먼저 말했다.

  "........."

  "집에 놀러 오세요, 저 골목으로 들어가 왼편 골목에서 셋째 집에요. 한 번 오세요, 아버지도 궁금해 하시던 차니깐요"

  "네, 한 번 찾아 뵙겠읍니다"

  "지금 어데 계세요"

 '그'는 눈살을 찌뿌렸다.

   "저 초량......"

   '그'는 말끝을 맺지 못하고 흐려버렸다.

   "바쁘시면 가보세요. 그럼 꼭 한번 오셔야요"

백희는 또 다짐을 했다.

   "네"

'그'는 멋없이 대답만 하고, 백희가 목욕탕으로 들어 가는걸 보며 발을 옮겼다.

   도대체 말이 많다고 생각했으나 그의 서글서글한 눈의 광채, 바로잡힌 얼굴에 살결이 흰 것, 목소리가 맑은 것 등 모든게 '그'를 즐겁게 해주었다.

   백희를 그런데서 만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뜻 모를 웃음이 퍽 나가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 생각해봤다. 백희가 옆집에서 살던 것, 그러면서도 서로 한번도 말해 본 적이 없던 것, 학교 갈때마다 전차를 함께 탓으나 서로 외면하던 것, 모든게 어제 일만 같었는데, 남단(南端) 항구의 골목에서 만난다는 게 도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어느새 사범학교에 주둔해 있는 야전병원부대 앞에 왔다.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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