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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연 Jul 05. 2024

단편소설 <수건>(1954) ②

영화사가 노만 15

서울고 부산 분교 교정에서. 1953년 경. 음악 담당 교사 이성삼(앞줄 중앙)과 학우들과 함께. 앞줄 맨 오른쪽이 노만. ⓒ 노만, 한상언영화연구소.


(①에서 계속)


  몇 주일이 지났다.

  오늘도 '그'는 종업원들과 같이, 병원차를 나란히 세워둔 운동장에서 자기가 맡은 차를, 물을 떠다 닦고는 모빌유를 칠했다. 깨끗해지며 윤이 났다. 안(內)도 물로 씻어 내리고 소독을 했다.

  차 안은 양쪽으로 환자를 실을 수 있는 '들것'같은 침대가 셋 씩 있었다. 밑바닥 양쪽엔 담요 같은 소용되는 물건을 넣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는 일을 끝내고 능숙한 솜씨로 그 매칸을 뒤지는 게 한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칸마다 담요들과 그리고 세면도구들, 그 외엔 종이 나브랭이들이 굴러 다녔다. '그'는 그 차에서 나와 옆의 차로 갔다. 붉은 십자가 그려져 있는 문을 살작 열고 들어가선 아무도 모르게 닫았다. 곧 뒤지기 시작했다. 하나 '그'가 노리는 레이숀은 없었고 예의 담요들 뿐이었다. 한 칸을 열자 레이숀 '통'들이 마구 널려 있었다. '그'의 눈은 빛났다. '그'는 살그머니 문 밖의 동정을 살피고는 익숙한 솜씨로 '통'을 뜯기 시작했다. 조바심과 두려움으로해서 가슴이 울렁거리는 건 어느 때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입이 찢어져라 넣고, 먹으면서도 밖을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맛이 쓴지 단지 어떤 것이 입에 들어가는 것 조차 분간하기 힘들게 눈은 밖을 보고 손만이 입으로 왔다갔다 했다. 그때 앞 운전대에서 인기척이 나는 듯 했다. '그'는 재빨리 그 칸 속에 통들을 쓸어 넣고 입의 것은 그대로 삼켜버렸다.

  갑짜기 문이 열리며 그 차 운전수인 흑인 병사의 검은 얼굴이 나타났다.

  "여기서 뭘하는 거야!"

  소리를 빽 지르고는 의심 난다는 듯이 '그'를 노린다. '그'는 힐끗 병사의 눈치를 살피곤 아무 말도 없었다. 입에 남은 음식물이 들키지 않아야 했다.

   "나와!"

  흑인 병사는 아무래도 수상적었던지 차에 올라가서 레이숀 들었던 칸을 열어봤다. '그'는 얼굴이 핼쑥해지며, 재빨리 입의 것을 우물거려 넘겼다. 이(齒) 사이에 낀 것을 없애려 혀를 놀렸다.

  흑인 병사는 '그'의 앞으로 닥아와 입을 벌려 보라는 말도 없이 그 우락부락한 시컴언 손으로 다짜고짜 '그'의 입을 벌려 봤다. 이어 '깟뎀' 소리가 병사의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그 무지한 손이 '그'의 뺨을 후렸다. 눈에서 불이 번쩍 났다. 손이 뺨으로 갔다. 아픈 줄을 몰랐다. 하나 눈물이 핑 돌았다. 서름이 복받쳐 올랐다. 아픈 게 아니었다.

   흑인 병사는 그냥 갔다. '그'는 한편 다행이라 여겼으나 여간 분한게 아니었다. 흑인병사에 마구 욕지거리를 했으나 알아 듣지 못하니 반응이 있을리 없다. 역시 분은 머리 끝까지 오를 뿐이었다. 다음 기회엔 좀 더 크게 해야겠다고 별렸다. 다음에 할 걸 상상하니 좀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활활 타는 왼쪽 뺨을 어루만지며, 교사(校舍) 앞에 있는 향나무 그늘 밑으로 갔다. 종업원 몇 사람이 있었다. 모두 담배를 시름하니 빽빽 빨고 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점심 시간이란걸 알알았다. 그러자 곧 배가 허출함을 느꼈다. '그'는 레이숀 먹었다는 걸 깨달었으나, 어데로 먹었는지 도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천천히 구수한 식욕을 북돋아주는 냄새를 풍기는 식당으로 발을 옮겼다. '그'는 낯익은 사람에게 음식 남은 것이 있으면 좀 달라고 했다. 그릇 씻기에 바쁜 그 사람은 귀찮은 듯 했으나, 막 씻은 접시 하나를 들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우동 비슷한 매크론 한 접시를 내 던지듯이 '그'의 손에 쥐어줬다. '그'는 딴 생각할 틈도 없이 매크론 퍼 먹기에 바빴다. '그'는 순식간에 한 접시를 치우고,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나무 그늘 밑으로 뛰어갔다. 이미 매맞은 기억은 사라졌다.

   "재미 좋군"

   나무 밑에 앉아 있던 얼굴이 부은듯 한, 중년쯤 되보이는 사내가 부러운 듯 말을 던졌다. '그'는 씩 웃고는 그 옆에 앉었다. 모두들 여전히 담배들만 빨고 앉아 있었다. 몇몇 '그'와 동대쯤 되는 나어린 사람만 안 보일 뿐이었다.

   조금 있더니 그들은 하나 둘 푸시시 일어나서 어데론지 가 버린다. '그'에게 말 던지던 사람만이 여전히 담배를 피우고 있을 뿐이다. '그'도 아직 점심시간이 좀 더 남은 것을 알고 뒤뜰에 갔다. 거기엔 커다란 쓰레기통이 있었다. 의례히 신문 나부랭이나 잡지들이 굴러다녔다. '그'는 쓸만한 잡지를 추려서 묶어 감추었다. 가지고 나가서 팔 참이다. 쓰레기통엔 이외의 드람프, 면도칼날, 허리띠 장식 따위들이 굴러단였다. 주어 넣었다. 쓸만한 거면 주어 넣는게 습된이 되어 버린지 오래다. 그것들이 모두 적으나 많으나 돈이 되어주었다. '그'는 냄새나는 것 조차 잊고 쓰레기 뒤지기에 열중하기를 곧잘 했다. 의외의 소득은 숲수푼이었다. 숟가락이 없어 산다산다 하면서 아직도 못사고 있던 '그'다. 그놈 갖다 씻으면 멀쩡하리라 생각했다.

   '그'는 피곤해서 앉었던 나무 밑으로 돌아왔다. 그 중년쯤 되보이는 사내는 아직도 혼자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무엇을 곰곰히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그'는 문득 그 사내에게서 아버지 습관의 일면을 보는 것 같았다. 어떤 친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저씬 언제 피난 오셨어요?"

'그'는 불쑥 말을 부쳤다.

   "한 두어달 되지"

그 사내는 입에 물었던 담배를 손에 옮기며 고개를 천천히 돌려 '그'를 보면서 대답했다.

   "서울 어데 계셨어요?"

   "종로에……"

   "뭘 하셨어요"

   "그래 무얼 했으리라구 생각허니"

빙긋 웃으며 오히려 반문했다. 귀찮은 표정은 아니었으나, 그 웃음은 울듯한 쓸쓸한 미소였다.

    "………"

   '그'도 말 없이, 얼굴에 미소를 띠우다 말았다.

그 사내는 담배 한 목음을 들여마시곤 한숨과 함께 푹 내뱉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느 학교에 다녔었지?"

  "××중학에요."

  "좋은 학교에 다녔구먼. 몇 학년이었지?"

  "사학년에 다니다, 사변이 나서 여기에 왔읍니다."

  "음……"

그 사내는 신음하듯 하더니 담배 연기를 한숨 쉬듯이 후 내뿜었다. 그리고는 잠잠히 무슨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돌히 하세요"

  "이것 저것…… 살기기 귀찮어서……"

그 사내는 말끝을 흐려 버리며, 괴로운 듯 얼굴을 찡그리며 담배 한목음을 다시 들여 마셨다.

   침묵이 흘렀다.

   '그'는 '그'대로 담배 피우는 것을 보고 있고, 그 사내는 아까 모양으로 시무룩하게 앉아 담배만 피우고 있을 뿐이었다.

   "이래서야 어떻게 살아 백일수가 있느냐 말이다"

그 사내는 불쑥, 혼자 중얼거려 댔다.

   '그'는 깜짝 놀라 그 사내를 응시했다. 동정을 살폈다. 그 사내의 충혈진 눈은 뭘 몹시 찾는 눈초리였다. 그러나 그 눈엔 눈물이 고여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아니다, 그저 ………"

   그 사내는 후 한숨을 쉬면서 다 탄 담배를 새로 고쳐 물고 흐렸던 말을 이었다.

   "너도 마찬가지겠지만 생활이 여이치 못한 데다 애까지 잃어버리니 정신이 온전치 허구나. 거기에다 또 설상가상으로 집의 사람이 거의 해산할 때가 됐으나, 너도 알겠지만 그 수용소에서 애를 낳자니 곤난한 데다, 또 먹을 것이나 변변하냐 말이다. 이런 걱정 저런 걱정을 하고 살자니 이젠 참말로 무거워졌다. 이젠 완전히 내 생애는 실패라는 걸 느꼈기에……. 그래도 희망이란 것이 있으면야 못살겠느냐만, 인젠 그것 마저 잃어버렸단 말이다. 죽을 날만 기다리는 생활 -- 이게 생활이냔 말이다.

    어린애를 나면 또 걱정이 어떻게 맥여살리는 것 뿐이 아니라 그걸 또 입혀야지, 그것보단 우선 싸아줄 포대기가 있어야지, 그러니 집의 사람이 나에게 가만이 있겠니. 또 지금 젖먹는 놈은 애만 나면 젖을 먹으니 다른 거라도 멕여야지. 이리저리 시달림만 받아야 하니 모든 게 귀찮아졌다. 언제나 죽을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그게 차라리 하나의 행복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후--"

   그 사내는 두서없이 마구 지꺼려 댔다. '그'가 듣고 있는 것도 잊은 것 같았다. 애꿎인 담배만 마구 빨아댔다.

   '그'는 종업원들이 거진 다 나간 후에야 정문 앞으로 갔다. 쓰레기에서 주워 모은 잡지는 손에 들고 그 외의 것은 주머니 넣은 채다. 문에는 위병인 흑인 병사가 나가는 사람의 몸을 더듬어 검사하고 있었다.

   '그'는 여짓것 경험으로 보아 쓰레기에서 주어 모운 것들은 통과 시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병사 앞에 섰다. 양손을 쳐들었다. 검은 손은 가슴서부터 더듬어 아래 주머니로 갔다. 두두럭한 주머니를 만져보자, 내보이라는 시늉을 한다. 도람프 나부랭이였다. 다른 주머니를 만지자 역시 꺼내보라고 한다. 숲수푼이었다.

   "누가 준거야!"

   '그'는 우물거리다, 쓰레기통에서 주운 것이라고 손짓을 해가며 겨우 대답했다.

   "철썩"

눈에서 불이 뻔쩍났다. 아픈 줄도 몰랐다. 악이 받쳐올랐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숟가락을 뺐지 않고 도루 주는 것을 받아가지고 문을 나섰다. 그 앞으로 지나가던 몇 사람이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는 아무런 꺼리낌 없이 그들의 앞을 지나갔다. 뺨이 활활 달아오는 걸 느끼며, 얀방 손으로 문질렀다. 악이 바짝 올랐다. 다음부터는 좀 더 큰 것을 가져 나오기로 결심했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좀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이었다. 제법 휘파람을 불며 발을 옮겼다.


(③에서 계속)


《경희》5집 제작 당시를 회고하는 노만. 2024년 5월 1일 서울 공덕동 자택 인근, 한상언영화연구소·책방 노마만리 한상언 대표와의 인터뷰. ⓒ 유창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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