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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연 Jul 22. 2024

명동 휘가로다방, 전창근과의 첫 만남

영화사가 노만 26

1945~1960년대 명동 다방 지도 (주간조선 2012.11.12 (통권 2231호) 기사)


"잡지 일로 자주 드나들었던 곳이 명동의 다방이었다. 시인, 소설가, 화가, 작곡가, 영화감독 등, 당대 문화예술인들이 모두 모인 곳이었다. 다방에서는 뜨거운 물을 부은 가루 커피에 '카네이션'이라는 회사에서 나온 연유를 듬뿍 넣어 준 커피가 나왔다. 아침이면 쌍화탕이나 계란 노른자를 얹어서 준 '모닝커피'가 나오기도 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명동은 북적거렸다. 전쟁 직후였으니, 명동성당 첨탑 만이 우뚝 솟아있고 나머지는 모두 폐허나 다름 없었다. 곳곳에 자리한 다방은 영화 제작자, 감독, 시나리오 작가, 배우들의 '응접실'이자 '사무실'이었다. 모든 일이 그곳에서 오고 가며 결정되었다. 따로 영화사 사무실을 두었던 곳은 얼마 되지 않았다. 세도 비쌌을 뿐더러, 영화가 흥행이 안되면 그 세를 낼 수 없었으니. 그때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영화사들 대부분 그런 형편이었다. 잡지에 실리는 배우들의 화보와 브로마이드 촬영도 명동에 있던 '고향사진관'이나 '신흥사진관'(그때는 '사장'(寫場)이라고도 불렀다)에서 다 했었으니. 거기서 갓 데뷔했던 배우 강효실을 데리고 가 사진을 찍은 것도 기억에 남아있다. '전진희'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던 그녀의 사진이 《영화세계》 1955년 3월호 표지로 쓰였다. 잡지 업무를 하기 위해서는 영화인들을 만나야 했고, 당연히 명동으로 가야했다.

'휘가로다방'과 '동방싸롱'이 주 출입처였다. 초년 기자 시절부터 그곳에서 수많은 영화인들과 마주쳤다. 휘가로다방에서는 전창근, 유현목, 홍성기 감독, 배우 전택이, 노경희 부부, 촬영감독 김학성, 1958년 <소낙비>로 메가폰을 잡은 이경식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 <비오는 날의 오후 세 시>(1958)를 연출한 박종호 감독이 있었다. 동방싸롱은 주로 연극인들의 아지트였다. 이해랑, 이진순 선생과 배우 김동원을 그곳에서 만났다. 특히 이해랑 선생은 우리 영화인들 보고 "이 활동사진 쟁이들!"하고 불렀다. '활동사진'이라니, '연극'보다 좀 아래로 봤던 건지(웃음). 하여튼 선생의 그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로 유명한 시인 박인환, 소설가 이봉구 선생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박인환 선생은 항상 통 있는 바바리코트 차림을 한 '멋쟁이'였지 않았나. 그는 영화에도 관심이 많아서 영화평론을 자주 쓰기도 했다. '명동백작' 이봉구 선생 역시 영화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분이었다. 후에 내가 쓴 책 『다시 보고 싶은 영화』를 가져다 드리니, "미스타 노! 이건 내가 썼어야 하는 건데!"하며 아쉬워하며 감탄하시던 것도 기억난다.  

나이 차이가 무려 10살 이상 나는 이들과도 허물없이 지내다 보니, 내 연배의 혹은 나보다도 나이가 많았던 여배우들이 특히 나를 어려워한 것 같다. 서로 나이를 묻고 따지는 것도 없이 끼워줬다. 영화인들과 어울리는 게 신선하고 재밌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나를 서울대 출신 학생 기자라며 끼워준 것도 있었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서울대는 고사하고 대학까지 마친 예술계통 혹은 영화인들이 드물 때였다. 이들과 가까워졌다. 특히 잡지가 기획 특집으로 마련된 영화인 좌담회에서 이들을 섭외하는 것도 나의 주 업무였다. 나는 좌담회의 배석자로 자주 참석했다. 당시 현장 영화인들의 고민과 목소리를 가까이서 들을 수 있었다. 녹음기도 없었던 시절이었으니 기사는 그 자리에서 일일이 받아 적거나 나중에 하나하나 복기해야만 했다.

그 무렵, 휘가로다방에서 만난 영화인 중 한 명이 전창근(全昌根, 1908~1973)이었다. 그는 1908년생으로 내 아버님과 동갑이었다. 그만큼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하지만 가까이서 본 전창근은 마치 큰 형님 처럼 소탈하고 호방한 사람이었다. 다방에서 마주칠 때면 항상 "미스타 노! 오늘 내가 한 턱 낼터이니 같이 가지!" 하고 동료 영화인들과 함께 나를 챙겨주었다. 밥도 술도 많이 사줬다. 금방 가까워졌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이 그의 상해 시절 이야기였다. 하루는 권투 시합에 나가서 돈을 벌어온 적도 있었다고 했다. 맞아도 돈을 주었으니까. 그곳에서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고전을 면치 못했던 시절의 이야기들이었다. 언젠가 그에게서 몇 장의 사진 자료를 받은 적도 있다. 그의 프로필 사진과 배우 심영, 전옥이 나온 <복지만리>(1941)의 스틸컷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그와의 친분으로 쓸 수 있었던 기사가 <감독 '전창근' 씨 가정을 찾아서>였다. 《영화세계》 1955년 11월호에 실린 '명우 가정 탐방기'라는 제목의 특집 기사였다. 필자명이 'R기자'로 나온 그 글은 영화세계 입사 후 최초로 쓴 단독 기사였다. 돈암동에 있던 그의 자택으로 찾아갔다. 특별히 긴장하지도 않았다. 질문들은 평소에 궁금했던 것들이었다. 영화인으로서 그의 고민과 영화계 입문 동기, 사모님이신 배우 유계선 여사와의 만남, 앞으로의 포부... 그와의 친분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로서는 행운이었다."

노만, 1955년. 영화세계 기자 시절. (c) 노만, 한상언영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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