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창연 Jul 23. 2024

<단종애사>와 이진섭

영화사가 노만 27

1908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한 전창근은 서울 중앙고보와 중동고보를 거쳐 1926년 상해로 건너가 무창대학 중국문학과에서 수학하는 한편, 영화계 진출을 모색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운영하던 인성(仁成)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던 그는 1928년 상해 대중화백합영판공사에 입사하여 정기탁의 <애국혼> 각본을 담당했고 1930년 이경손이 연출한 영화 <양자강>에 조대의 역을 맡으면서 영화 이력을 시작했다. 이후 귀국한 그는 <복지만리>(1941)의 각본, 연출, 주연을 맡아 화제를 모았다. 이 영화로 인해 일제로부터 옥고를 치르기도 한 그는 해방되기까지 영화 활동을 멈춘다. (김종원 편, 『한국영화감독사전』, 민속원, 2004, 562~563쪽 참조)

해방 직후 그가 출연한 <자유만세>(1946, 최인규 감독)는 그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독립투사 최한중을 연기했다. 이후 그는 <민족의 성벽>(1947), <해방된 내 고향>(1947), <여인>(1948), <그 얼굴>(1948)으로 연이어 메가폰을 잡았고, <불멸의 밀사>(1947, 서정규 감독), <바다의 정열>(1947, 서정규 감독), <민족의 새벽>(1947, 이규환 감독), <파시>(1949, 최인규 감독), <푸른 언덕>(1949, 유동일 감독) 등의 각본을 집필, 참여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중에는 부산과 마산 등지에서 조직된 향토문화연구회의 제작으로 <낙동강>(1952)을 연출하여 영화활동을 이어가기도 했다.

전창근은 1950년대에도 활약을 이어갔다. 전쟁영화 <불사조의 언덕>(1955)을 시작으로 춘원 이광수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단종애사>(1956), <마의태자>(1956) 등의 역사물, 홍콩의 도광계, 일본의 와카스기 미쓰오와 공동연출한 합작영화 <이국정원>(1957)의 메가폰을 잡아 커다란 화제를 모았다. 이후 그의 필모그래피는 <수정탑>(1958),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1959), <삼일독립운동>(1959), <아아 백범 김구선생>(1960), <운명의 골짜기>(1962), <광야의 왕자 대 징기스칸>(1963, 이종기와 공동연출), <차이나타운>(1963) 등으로 이어졌다. 영화 연출 활동은 1960년대 초반에 멈추었지만, <불나비>(1965, 조해원 감독), <순교자>(1965, 유현목 감독), <일월>(1967, 이성구 감독), <어느 여배우의 고백>(1967, 김수용 감독) 등 1960년대 후반까지 배우 활동을 이어갔다.

<단종애사>(1956, 전창근 감독) 포스터


특히 춘원 이광수의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단종애사>는 조선 초기 문종과 단종, 훗날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의 권력다툼과 궁중 비극을 다룬 역사물이었다. 전창근과 친분을 다지게 된 노만은 그의 가정을 방문한 기사를 쓰는 한편, 그가 연출하던 영화 <단종애사>의 촬영현장을 취재 차 방문하게 된다. 이에 대해 노만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이 무렵, 잡지 취재차 <단종애사> 촬영 현장을 견학한 적도 있다. 난생 처음 구경간 영화 촬영 현장이었다. 실내 스튜디오 세트에서 문종이 승하하는 장면을 촬영 중에 있었다. 짐작한 대로, 전 감독은 현장 분위기를 완전히 장악하는 거다. 수염 분장을 한 채 메가폰을 들고 카메라 옆에서 '레디 고!'를 외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알려진 대로 그는 인상이 강하고 선이 굵지 않나. 신인 황해남이나 갓 데뷔한 엄앵란 같은 어린 배우들을 현장에서 꽉 잡고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모두가 꼼짝 못하는 분위기였다. 연기와 연출 두 가지를 모두 해내는 일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생각했다.

이 영화에서 문종 역을 맡은 배우는 이진섭(李眞燮, 1922~1983)이었다. 1953년 조선일보 외신조사부 기자, 이듬해인 1954년 경향신문 조사부장이었던 그는 박인환이 쓴 시 <세월이 가면>에 곡을 붙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만큼 다재다능했다. 그는 이 영화에서 '이섭(李燮)'이라는 예명으로 출연했다. 이 영화는 그의 유일한 영화 출연작이었다. 특별한 연기 경험이 있던 인물도 아니었다. 자신과 대비되는 눈이 처지고 왠지 병약한 인상을 유심히 봐두었다가 아마 그를 캐스팅했던 것 같다. 나중에 완성된 영화를 보고 나니 과연 전 감독의 선택이 탁월하다는 생각을 했다. 또 이 영화는 배우 엄앵란의 데뷔작이기도 했다. 오디션으로 뽑힌 단종 역의 배우 황해남의 모습도 기억난다. 그때만 해도 모두 갓 데뷔한, 앳된 신인들이었다.

전창근 감독과의 인연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나중에 『한국영화사』를 쓸 때 명동 다방과 그분의 사무실로 찾아뵈어 인터뷰도 하고 자료들도 받았다. 그가 이종기 감독과 공동연출한 영화 <광야의 왕자 대 징기스칸>에 제작자이자 투자자로도 참여했다. 그러나 이 영화의 흥행은 그리 신통치 않았다. 이 무렵 후속 감독들이 치고 올라오고 전 감독의 영화 활동도 예전처럼 얼마 못갔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는 굵직한 선의 시대극 연출을 고집했던 것 같다. 전창근 감독은 1970년 전후 무렵까지 뵈었던 것 같다. 아버님이 운영하던 퇴계로 금성센터 근처에서도 자주 만남을 가져왔다. 그러나 내가 영화 일과 차츰 거리를 두게 되면서 더는 뵙지 못했다. 전창근 감독은 1973년 1월 타계했다."

<단종애사>에서 문종 역으로 분한 이진섭

                    

매거진의 이전글 명동 휘가로다방, 전창근과의 첫 만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