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20일차_중국 리장을 닮은 레디고스…사하군과 칼사다 델 코토
아침 6시에 일어나 식사 준비를 했다.
식당에 들어가니 이탈리아 순례자 프레도가 아침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조용히 그의 옆으로 다가가 기도문을 살펴보니, 묵주의 9일 기도와 비슷하다.
프레도는 30여분을 기도한 후 자신이 준비한 아침을 꺼내 먹었다.
나는 프레도의 앞자리에 앉아 함께 간단한 식사를 했다.
나의 메뉴는 샐러드였고, 프레도는 하몽을 바게트에 넣어 먹는 샌드위치였다.
프레도는 인사이더(인싸)다. 사람들과 빨리 친해지고, 함께 이야기도 잘하는 사람이다.
아침식사 도중 어젯밤에 있었던 이야기를 꺼낸다.
어젯밤 우리 숙소에서 밤새도록 오케스트라가 울렸다고 한다.
그 주인공들은 스페인 순례자 4인방과 나였다.
이들 4인방은 숙소 문이 닫힐 시간까지 근처 바에서 코가 비들어지도록 마신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들이 방이 들썩이도록 코를 골았다는 내용이었다.
코 고는 소리가 마치 오케스트라 연주처럼 들렸다는 것이다.
한 명은 드르렁 드르렁, 그 옆의 잠을 자는 순례자는 끄륵 끄륵.
또 다른 사람은 아주 길게 코를 골았단다.
나는 숨 넘어가는 사람처럼 코를 곤다고.
“미안해요. 프레도!”
“아니야. 알베르게에서는 익숙한 일이야. 어젯밤 너무 웃겼어.”
프레도는 자신의 카미노 스토리가 또 하나 늘어났다며 즐거운 듯 이야기를 계속했다.
프레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런 이야기을 들을 때마다 솔찍히 미안하다.
내가 코를 심하게 곤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다.
알베르게에서는 일찍 잠에 드는 것이 유리하다.
알베르게에서는 늦게 자면 다른 사람의 코골이로 잠을 제대로 못 잔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떠날 때 항상 챙기는 물건이 있다.
그것은 헤드셋이다.
스마트폰에 ‘백색소음(계곡물 흐르는 소리와 빗소리를 좋아함.)’을 담아 놓고, 잠을 잘 때는 백색소음을 들으며 잔다.
이렇게 헤드셋을 켜고 누워도 주변에서 들리는 코 고는 소리가 헤드셋을 뚫고 들어오는 경우도 허다하다.
내 비장의 무기를 꺼낸다. 내 헤드셋은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있다. 이런 날에는 노이즈 캔슬링이 위력을 발휘한다.
백색소음을 틀어 놓고 잠을 청하면, 어느새 잠이 들어 눈을 뜨면 다음날이 된다.
순례길을 가는 분들이 있다면 헤드셋을 챙겨가면 많은 도움을 받을 것이다. 물론 배낭은 무거워지겠지만 말이다.
메세타 고원(평원)의 찬바람은 손을 얼얼하게 할 정도로 차다.
해가 중천에 뜨기 전까지는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이겨내며 걸어야 한다.
손을 얼리는 찬바람 때문에 장갑을 챙겨 오지 않은 것을 무척 후회했다.
지금은 아침마다 손이 시려워 미칠 지경이다.
길을 걷는 도중 프레도와 또 만났다.
프레도는 세상의 평화를 위해 지금 순례길을 걷고 있다.
그는 메주고리예 성모 신심이 가진 사람으로, 그의 순례길은 곧 메주고리예 신앙고백이었다.
메주고리예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당시 유고슬라비아)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40년전인 1981년 6월 24일, 메주고리예라는 작은 마을에 성모님이 나타났다.
메주고리예의 한 언덕에 다섯 명의 아이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신 것이다.
다음날인 25일도 나타나셨는데 당시 목격 증인은 여섯명의 아이들(미리야나, 비츠카, 이반카, 마리야, 이반, 야곱)이었다. 성모 마리아는 아이들에게 자신을 ‘평화의 모후’라고 소개하고, 병들고 죄악 만연한 세상에서 회개하고 하느님과 새롭게 화해하라는 말씀을 전했다고 한다.
메주고리예 성모님의 메시지는 다섯가지였다.
첫째는 기도다.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여라.
둘째는 의심하지 말고 하느님을 굳게 믿으라는 신앙촉구다.
셋째는 예수님을 삶의 첫 자리로 모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해야 할 회개다. 끊임없이 회개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넷째는 단식이다. 물질에 대한 탐욕에서 해방되고 전적으로 하느님을 의지하라는 뜻.
다섯째는 평화다. 참된 평화는 오직 하느님께서만 온다.
첫째부터 넷째까지 모두 참된 평화의 길로 가기 위한 조건이다.
결국 요약하면, 하느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의 길을 향해 가라는 메시지다.
지금은 메주고리예 성모를 ‘평화의 모후’라고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이 표현한다.
당시 교황청 신앙교리성성 장관이었던 라징거 추기경(이후 베네딕도 교황. 스스로 물러나심)은 메주고리예 성모 발현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현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발현을 교회가 인정하기는 시기상조를 입장을 내놨다.
다만, 평화의 성모가 전한 메시지는 교회가 지키고 나아가야 할 바른 방향이기에, 깊은 신심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장소로 받아들여 메주고리예로의 순례는 허용했다.
어쩌면 지금 내가 걷는 것도 참된 평화를 찾기 위한 길이 아닐까?
처음에는 단단해지자는 마음으로 걸었다.
지금은 기도하고(제1메시지), 하느님께 의지하고(제2메시지), 내가 지은 죄를 묵상하고(제3메시지), 살기 위해 먹으며(제4메시지) 걷고 있다.
왜인지 몰라도 메주고리예 성모님의 메시지와 내가 행하고 있는 행동들이 닮아 있다는 느낌이다.
순례길에서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이 나에게 벌어지고 있다.
지금 이 순례길을 나 혼자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지금 이냐시오 영신수련법으로 하느님께 다가가고 있다.
그 첫발로 지금까지 지은 죄를 묵상중이다. 죄의 근원을 찾고 있다.
지금은 명호가 트인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때까지의 죄 묵상이 끝났다.
영적인 이끌림 없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죄라는 것을 다시 느낀다.
'어린 아이가 무슨 죄가 있겠어!'
지난 행위를 돌아보면, 하느님이 슬퍼했을만한, 성모님이 슬퍼했을만한, 부모님이 슬퍼했을만한 일들이 참 많았던 것이 보인다.
'주님! 저는 나는 죄많은 인간이에요! 죄송합니다.'
프레도는 지금 메주고리예 성모 신심으로 ‘세상의 평화를 위해’ 걷고 있다.
나 역시 이냐시오 영신수련 방법을 통한 '내적 평화'를 위해 걷고 있다.
그의 걸음은 세상의 평화를 위한 한걸음 이라며,나의 발걸음도 나의 평화를 위한 한걸음이라고 생각했다.
레디고스를 향해 걷는 도중, 순례자들이 돌맹이로 글자를 만들어 놓은 것을 발견했다.
우리나라 글씨도 보인다.
‘사랑해’, ‘힘내’
글씨는 보니 정말 힘이 난다.
순례길에 써 있는 돌맹이 글씨에 누가 마법을 부려 놓았나 보다.
어느덧 목적지 레디고스에 도착했다.
레디고스의 알베르게는 카페와 함께 운영되는 곳이다.
다인실에 들어가니 너무 어둡고 칙칙했다. 건물도 오래됐다.
‘이 곳엔 베드버그가 있을 것 같아.’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걱정이 심해져 회장님께 2인실로 가자고 청했다.
2인실은 그나마 햇빛이 잘 들어와 밝은 방이었다.
이날은 방에 들어가자 마자 침대 이 곳 저곳에 계피나무로 도배했다.
순례길 숙소 가운데 가장 베드버그를 걱정한 날이다.
오늘부터는 장 회장님과 비용을 각자 계산한다.
장 회장님은 방에서 바게트 빵으로 저녁을 해결한다고 하신다.
나는 저녁(세나) 순례자메뉴를 예약하고, 저녁 7시까지 시간이 있어 레디고스 마을을 둘러봤다.
레디고스는 진흙집이 대부분이다.
김동률의 ‘출발’이라는 뮤직비디오에 나온 리장과 마을과 비슷한 느낌이다.
마을 성당은 언덕 위에 있다.
마을을 둘러보다 갓 시멘트로 발라 놓은 길을 무심코 지나가 버렸다.
발목까지 쑥 들어가 내 발자국이 시멘트 위에 도장처럼 찍혀있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 도망쳐 숙소로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그거 제가 한 일이에요. 다른 사람 욕하지 마세요.’
저녁 순례자메뉴는 프레도가 추천한 음식을 먹었다.
소갈비찜 같은데 내 입맛에 맞지는 않았다.
저녁을 먹고 나니 프레도가 스페인 전통술을 마셔보라며 한 잔을 사줬다.
무척 쓰다. 맛도 없다.
프레도는 내 일그러지는 표정이 재밌나보다.
한 잔 더 하라고 한다.
‘됐네! 이 사람아!’ 욕 나올 뻔 했다.
레디고스는 바람이 엄청 강하게 불었다.
밤새도록 바람이 휘파람을 분다.
오늘도 백색소음을 들으며 잠을 잤다.
오늘은 칼사다 델 코토로 향하는 일정이었다.
아침에 출발하려니 어두운 하늘이 내려앉았다.
비가 내릴 것 같은 불안이 가득했고, 그건 현실이 되었다.
새삼스러운 비는 아니었지만, 가볍게 떨어지는 빗방울에는 우비를 입을지 말지 고민이 들었다.
"순례자라면 이 정도 비쯤이야.“
우비를 입고 벗는 번거로움때문에 비를 맞으며 걸어가기로 했다.
낮 10시가 되자 하늘이 서서히 맑아져 간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언덕에 자주 보이는 곳이 있다.
그곳은 와인이 보관되는 창고로, 특이한 표지판이 눈에 띈다.
"No, the hobbits don’t live here! - 호빗(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난장이 이름)은 여기에 살지 않아.“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집으로 착각하는 것 같다.
무척 친절하게 '호빗'은 여기 사는 게 아니라고 알려준다.
이 공간은 '보데가스'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며, 음식을 보관하고 와인을 생산했던 곳이다.
로마 시대 이후로 이어져 온 문화의 일부로, 현재도 일부 공간이 사용되고 있다.
가장 아래에 적힌 경고는 매우 재밌었다.
"Please do not leave trash, or use the bodegas as toilets. - 보데가스는 화장실이 아니에요.
생각해 보면 그 모양새가 화장실로 적합한 것 같은 움푹 들어간 형태였다.
보데가스를 늘어선 장소를 지나면 곧 사하군에 도착한다.
도착 시간은 12시 30분이다.
이곳에서는 어떻게 할지 망설였다.
사하군은 유적지가 많을 뿐만 아니라 산티아고 순례길 중간 지점으로, 순례자 증서를 받을 수 있는 중요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성당(Iglesia de la Trinidad) 순례자 동상 앞에서의 기념 촬영 후, 장 회장님과 성당 건너편 카페에서 점심을 즐기며 향후 계획을 논의했다.
회장님은 처음에 계획한 대로 칼사다 델 코토(Calzada del Coto)까지 가자고 말씀하셨다.
나 또한 걷기에는 몸 상태가 무리가 없어 기꺼이 동의했다.
하지만, 이곳은 놓칠 수 없는 문화 유적이 가득한 곳이어서 시간을 내 둘러보고 가기로 했다.
마을 이름의 유래도 흥미로웠다.
사하군이라는 이름은 푸가시오 성인(San Fagatius)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푸가시오는 다미아노(San Damianun)와 함께 영국 선교에 나선 2세기 사람으로, 웨일스 주교로 알려져 있다.
푸가시오와 다미아노를 영국의 사도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이 사하군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프랑스에서 온 클뤼니 수도사들에 의해서였다.
아마도 그들은 푸가시오의 선교 정신을 이곳에 뿌리내리려 했던 것 같다.
사하군에서 가장 흥미로운 유적지로는 산 베니토 아치(Arco de San Benito)와 산 만시오(Iglesia de San Mancio) 성당의 시계탑이 있다.
두 곳을 꼭 봐야겠다는 생각에 그쪽으로 걸어갔다.
산 베니토(San Benito)는 우리말로는 베네딕토 성인이다.
누르시아 베네딕토(베네딕토회)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영성가로, ‘수도회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인물이기도 한다.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가 베네딕토 수도회의 모토다.
산 만시오 성당은 베니토에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성당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순례자 중간 지점 통과 증명서를 얻을 수 있다.
회장님과 증명서를 받기 위해 사하군 도서관을 찾아 헤맸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도서관처럼 생긴 건물로 들어갔는데 관리자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증명서를 얻는 것을 포기하고, 칼사다 델 코토로 향했다.
사하군에서 순례길은 두 갈래로 나뉘게 되는데, 한 방향은 칼사다 델 코토를 거쳐가는 길이고, 다른 쪽은 데라디요스 델로스 템플라라리오로 직행하는 길이다.
우리는 길이 갈라지는 교차로에서 실수했다. 데라디요스델로스로 직행하는 길로 들어선 것이다.
다시 되돌아가 칼사다 델 코토로 향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여기에서 하루를 지낸 것은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공립 알베르게로 들어가기 기부제(도네이션)다.
이날 장 회장님, 나, 그리고 프랑스에서 자전거로 순례길을 따라온 흑인 3명이 넓은 숙박 공간에 머물렀다.
칼사다 델 코토는 너무도 조용한 마을이다. 시에스타에 진심인 듯하다.
카페와 슈퍼마켓은 모두 문을 닫았고, 거리에는 사람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마을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덧 언덕까지 올라왔다.
마을을 둘러싼 광활한 평야가 펼쳐져 있다.
저 멀리에 다른 마을이 보이지만 상당히 멀다.
주변에 그 누구도 없는 공간.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는 넓은 들판에 홀로 서면 외로움의 감정이 더 심하게 몰려오는 것 같다.
찬바람을 이겨내려 온 몸을 움추리고 있는 나를 보니 불쌍하게 느껴진다.
문득 지금 이 순간이 누구를 보고 싶은지 생각했다.
수많은 얼굴들이 떠오른다.
그 중에서도 역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가족들이다.
마지막 순간 내가 꼭 봐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
부르고스로 들어오기 전 떡갈나무십자가에 쓰여 있던 한글이 떠올랐다.
‘엄마, 사랑해’
들판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이 미치도록 그리워지는 시간이다.
저녁시간이 돼 다시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프랑스 자전거 순례자와 함께 식사를 가졌다.
그가 말을 걸어온다.
“어디에서 왔어?”
“한국에서 왔어.”
“너의 옆에 사람과 같이 온 거야?”
“응.”
“너네는 직업이 머냐?”
“우리는 농부야. 큰 농장에서 일하고 있어.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보스야.”
“그렇구나. 니네 부자구나!”
“아냐. 나는 일꾼이라 가난해. 부자는 내 옆에 돈 쓸 줄 모르는 내 보스지.”
“그렇구나! 니가 고생이 많다.”
“응. 지금 보스 데리고 다니느라 내가 엄청 힘들어.”
“힘내!”
프랑스 순례자가 장 회장님 눈치를 살핀다.
장 회장님께 프랑스인과 대화를 얘기해 줬더니 마냥 웃으신다.
‘우리 보스는 인기가 많은 것 같다.’
오늘 칼사다 델 코토 알베르게는 우리 3명뿐이다.
프랑스에서 온 자전거 순례자는 구석자리에 자리 잡았다.
장 회장님은 창가 1층 침대를 나는 한자리 건너 2층에 자리잡았다.
2층침대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2층이 더 편한가보다.
오늘밤도 세찬 바람이 불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