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머타임이 적용되다보니 사실상 새벽부터 걷는다. 오늘은 도로변으로 나 있는 순례길을 계속 따라 간다. 아침 찬 바람에 손이 너무 시리다.
오늘은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까지 20여km를 걸을 예정이다.
아침 7시 30분, 우리는 알베르게를 출발했다.
레벤가 데 캄포스(Revenga de Campos)라는 마을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카페에 들어가 아침을 먹다 장 회장님과 부딪혔다.
나는 아침식사로 빵과 핫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장 회장님은 입 맛이 없다며 아무것도 드시지 않고 내 옆에 앉아 쉬셨다.
스페인에서 카페에 들어가면 1인 1메뉴를 시키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다.
1인 1메뉴는 스페인뿐 아니라 장사를 하는 곳이라면 통하는 기본 예의 아닐까 싶다.
우리 누나도 커피숍을 운영한다.
그런데 가끔 커피숍에 와서 커피 한 잔만 시키고 몇 명이 자리를 둘러 앉는 경우도 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면 되레 내가 누나한테 미안해지는 기분이다.
그렇기에 커피숍에 들어가면 마시기 싫은 때라도 가장 저가의 음료를 주문하는 습관은 잘 들여진 것 같다.
이날 장 회장님이 아무것도 시키지 않으니 자꾸 눈치가 보인다.
장 회장님은 이런 부분이 신경 쓰이지 않는 눈치다.
그래서 회장님과 함께 할 때면 되도록 야외테이블을 이용했다.
다시 밀밭길 사이로 올라섰다. 이 길의 끝은 어디일까? 앞에 터벅터벅 장 회장님이 걸으신다.
아침식사 도중 갑자기 장 회장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윤 국장은 먹는 것 너무 챙기는 것 아냐?”
“아니에요. 빵과 커피도 잘 먹는 것 아니잖아요. 정말 살기 위해, 걷기 위해 먹어요.”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듯하다.
회장님께서는 내 말에 대한 답변이 아닌, 당신께서 하고 싶은 말을 계속 이어가셨다.
“윤 국장은 귀족처럼 챙겨 먹어!”
‘아! 회장님께서 하시려는 말씀은 식사 문제가 아니구나! 이것은 돈을 쓰는 문제를 얘기하시는 거야.’
내 테블릿에 기록된 글 가운데 ‘귀족’이라는 단어가 몇 번 등장하는 것을 보면 당시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지금은 오히려 그 내용을 보고 피식 웃고 있음.)
장 회장님께서 먹는 문제를 말씀하신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지금까지는 내가 돈 관리를 도맡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오기 위해 ‘트래블로그’라는 카드를 만들었다.
트래블로그는 원-유로 환전시 100% 우대를 받으며, 현장에서 카드결재가 가능하고, 출금시 일부 현지 은행에서 수수료가 전혀 붙지 않는 카드다.
이때까지 내가 하나은행 트래블로그 카드 2장을 모두 가지고 있다.
비용 사용의 투명성을 위해 모두 기록해 놓고, 회장님께 사용내역을 매일 말씀드렸다.
“윤 국장! 나한테 말하지 말고 편하게 해.”
회장님은 항상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나는 항상 회장님께서 비용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회장님의 탁월한 산수능력이다.
회장님께 놀랐던 부분은 계산에 대한 빠른 처리다. 걸어 다니는 계산기다.
나는 물건을 살때 한참을 생각하고 대충 얼마일꺼라 추측하지만, 회장님은 정확한 금액이 순식간에 나오는 분이다.
회장님의 ‘먹는 얘기’를 통한 지적은 돈을 너무 헤푸게 쓰는 것을 이야기 하신다고 생각했다.
‘회장님은 내가 돈을 많이 쓴다고 생각하시나?’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현재 쓰고 있는 비용에 대해 나는 ‘거지여행’이라고 생각했었다.
숙소를 구하는 것부터 순례길에서의 먹을거리에 대한 비용을 지출을 최소화하고 있다고 여겼다.
결국 이 같은 생각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회장님은 함께 쓰는 경비에서 나에게 더 많이 쓰이는 것이 못마땅한 것 일꺼야!’
이런 결론에 이르다보니, 내가 회장님을 위해 희생했던 모든 일들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화가 났다.아침을 대충 먹는 듯 마는 듯 하고 회장님께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드러내고 먼저 가겠다고 일어섰다.
당시는 내가 이런 말을 듣는 것이 ‘수모를 당했다’고 느꼈다.
비야카사르 하얀 성모 마리아 성당(Iglesia de Santa Maria la Blanca)이다. 카스티야 알폰소왕이 고딕양식으로 짓기 시작했지만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완성됐다.
나는 건축에 대해 잘 모른다. 그래서 간단하게 외우고 있다. 뾰족하면 고딕. 기둥이 두꺼우면 로마네스크. 이 성당 내부에 들어서 기둥을 보자마자 로마네스크라고 생각했다.
지금 시간은 11시 30분. 곧 비야카사르 데 시르가 마을에 도착했다.
아침에 카페에서 나온 후 지금까지 계속 기도했다.
‘주님 어떻게 해야 하나요?’
비야카사르에는 하얀 성모 마리아 성당(Iglesia de Santa Maria la Blanca)이 있다.
하얀(블랑카) 성모도 스페인에서는 치유의 기적으로 알려져 있다.
검은 성모(몬세라트), 하얀 성모(비야카사르).
하얀 성모님 앞에서 기도를 마치고 나오니, 바르셀로나에서 성당 견학 온 학생들로 가득하다.
학생들이 동양인인 나에게 관심을 보인다.
내가 기분 좋은 날이었다면 그 학생들에게 오랫동안 만난 친구들처럼 ‘올라(안녕)’하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을 테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다.
학생들이 나에게 다가와 어디에서 왔으며, 이름이 뭔지 묻는다.
내는 아무 말도 않고 지나치니 바로 뒤에서 한 학생이 ‘똔또(Tonto)’라고 말한다. 똔또는 바보라는 말이다.
그 주변에 있는 아이들이 모두 함께 큰 소리로 웃는다.
내가 못 알아듣는 줄 생각하는 것 같다.
‘다른 것은 몰라도 욕은 기막히게 알아듣는데 말이다.’
그러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다가오더니 ‘순례자(페레그리뇨)를 놀리면 안된다’고 훈계하시는 모습이 떠오른다.
‘아! 오늘 정말 이상한 날이다.’
하얀 성모마리아 성당 제대화다. 제대화 중심에 하얀 성모님이 앉아 있다. 스페인의 성모님은 옷 갈아 입느라 바쁘다. 검은 옷, 하얀 옷. 대관식땐 은색옷.
하얀 성모 마리아 성당을 나와 장 회장님께 카톡을 드렸다.
그리고 장 회장님을 만나 내가 가지고 있던 공용경비 모두와 회장님의 트래블로그 카드를 드렸다.
“회장님, 이제부터는 각자 비용을 쓰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회장님은 무척 당황해하시며 받지 않으려 하셨지만, 완강하게 나오는 나의 태도 때문에 곧 제안을 받아들였다.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때부터 회장님의 기분이 좋아지신 것 같다. 갑자기 미소 띤 얼굴로 다가오신다.
내가 이렇게 결심한 이유는 하얀 성모마리아 앞에서 들었던 음성은 ‘그가 원하는 데로 하여라!’라는 답변이었다.
어느덧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에 도착해 우리는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성령의 집(Espiritu Santo)알베르게로 갔다. 이 수도회는 빈체시오 드 폴(Vicente de Paúl) 성인이 창립자인 사랑의 딸 수도회다. 우리나라에는 사랑의씨튼 수녀회로 통한다.
이 알베르게는 좋은 리뷰와 나쁜 리뷰가 동시에 가득하다.
좋은 리뷰는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고, 1층 침대만 있어 쾌적한 숙박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반면 나쁜 리뷰는 수녀님들의 성격이 무척 괴팍하다는 내용들이다.
이 수도회는 자선사업을 위주로 선교활동을 한다. 성령의 집 알베르게의 비용은 7유로. 시설 대비 비용으로 보면 사실상 자선사업에 가깝다.
이곳의 특징은 1층 침대만 있다. 숙소도 깨끗하다. 그리고 숙소 이름이 대륙별로 정해져 있는데, 지금은 비수기라 그런지 우리는 ‘아프리카방’으로 배정받았다. 아프리카방은 남자가, 유럽방은 여자들이 쓰고 있다.
수녀님은 안내를 마치고 오후 5시에 기도방에서 ‘성령기도회’를 갖는다고 말씀하시고 떠나셨다.
그레이타와 나. 이 사진은 사랑의딸 수녀회 페이스북에 올라온 사진을 가져왔다. 허락은 얻은 장회장님 외엔 다른 사람들과 찍은 사진은 올리지 않기로 했다.
오후 5시. 기도방으로 가니 나 혼자 뿐이다.
잠시 후 헝가리 순례자 그레이타가 들어왔다.
5시가 조금 넘어 원장 수녀님인 듯한 분이 들어오셨다.
기도에 참여한 인원이 오늘 가장 적다고 하신다.
잠시 후 수녀님은 성모상의 시선, 성모님의 손바닥, 뻗어 나가는 빛줄기, 그리고 성모님의 은총에 대한 이야기 하셨다.
특히 성모상 주변의 빛의 모습은 조개의 무늬와 같은 방향으로 되어 있듯 은총의 간구도 성모님께 모여들어 모두가 하나된다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그러더니 갑자기 세상의 평화를 위한 노래를 부르자고 한다.
나보고 먼저 노래를 하란다.
‘에라 모르겠다.’
도망갈 수도 없어 포기하고 순간 생각난 Brother Sun Sister Moon 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다음은 그레이타가 헝가리 노래를 불렀는데, 리듬이 가스펠송 같았다.
그리고 우리 둘을 성모님 옆에 세우더니 사진을 찍으신다.
페이스북에 올려도 되냐는 물음에 ‘물론이에요’라고 답했다.
막상 수녀님이 알려주신 이 수녀원 페이스북에 들어가니 보니 나와 그레이타의 노래 부르는 모습과 우리의 사진이 올라가 있다. 많이 부끄러웠다.
그레이타는 저녁식사때 내가 노래를 너무 잘한다고 사람들 앞에서 칭찬을 늘어놓는다.
나는 노래를 사람들 앞에서 잘 부르지 않는데 오랜만에 큰소리로 열창을 해봤다.
그레이타는 이번이 3번째 순례길이란다.
그녀의 첫 순례는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방황하던 때였다고. 친한 친구가 이 길을 걸어보라고 제안했던 것이 첫 순례길이었다고 한다. 두 번째는 결혼을 앞두고 그 남자와 평생을 함께 할 힘을 얻기 위해 걸었다.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
지금은 아기를 갖기 위한 길이다. 새로운 존재가 자신의 삶에 들어오는 것을 어떻게 시작을 시작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 걷고 있다. 그녀는 용기가 필요할 때마다, 새로운 무엇이 생길 때마다 또 걸을 생각이라고 한다.
참 대단한 여성이다.
그레이타는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갖는 것을 목격했다.
어제 프로미스타에서 한국에서 온 순례자와 저녁에 산책할 때에도, 그녀가 성당 아래 벤치에 오랜 시간동안 홀로 앉아 있었던 것을 보았다.
오늘도 해가 지고 밤이 늦었는데도 알베르게 마당 앞 벤치에 앉아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있다.
성령의 집 내부에 세워진 예수성심상.
사실 그레이타와는 대화는 너무 힘들었다. 영어 자체가 고급영어다. 그녀가 쓰는 단어를 해석하기는 어렵다.
전체적인 흐름이 대부분 ‘패턴영어’다.
패턴은 미리 알고 있지 않으면 해석이 무척 힘들다.
순례길을 떠나 더 깊은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패턴영어를 알고 가는 편이 더 풍성해 것이다.
그녀와의 대화에서 정말 수준차를 극심하게 느꼈다.
이날 미국 유학생인 한국 청년이 없었다면 대화자체가 많이 어려웠다.
유학생의 통역으로 그레이타와 이야기를 나눴다.
들으면 들을수록 호감이 가는 사람이에게 오랜동안 대화하고 싶었지만, 이 것은 그 청년에게 못할 짓이다.
그레이타가 순례길에서 더 많은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다.
오늘도 카리온의 밤이 깊어간다.
성령의 집 알베르게 전경. 정면으로 보이는 2층이 남자 숙소며, 우측으로 불켜진 곳이 여자 숙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