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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과 압생트
이제 슬슬 대기로부터 여름 냄새가 밀려온다. 이 동네의 여름 냄새는 변하지도 않는다. 태양 아래서 그 특유의 냄새에 꽃향기가 섞여 코로 들어왔을 때, 나는 카뮈를 떠올렸다.
“봄철의 티파사에는 신들이 내려와 산다. 태양 속에서, 압생트의 향기 속에서, (...) 끓는 빛 속에서 신들은 말한다.” -「결혼」
나는 지중해의 태양도, 공기도 모르고 압생트의 향기도 모른다. 다만 어느 한낮에 공원의 초입을 걸을 때, 카뮈가 당신의 생을 사랑하도록 만들었던 자연과 영원의 감각, 그런 것을 나는 잠깐 느꼈던 것 같다.
어떤 면에서는 나는 카뮈를 부러워하고 있다. 어찌 되었든 카뮈에게는 생동하는 환경이 있었으며 늘 곁을 지키는 태양과 바다가 있었다. 심장을 고동하게 만드는 열기와 부글거림 말이다.
나는 한평생 이 동네를 벗어나 본 적이 없고, 심장을 고동치게 만드는 그러한 자연을 곁에 둔 적도 없다. 그래서 내 자아가 부동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고 또 그래서 지금 이렇게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런데 막상 떠나면 집이 최고다 라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 클래식 클라우드 – 카뮈 (2)
이 책을 읽으며 인상적이었던 텍스트와 그에 대한 내 생각을 기록한다.
p. 69 수천 년의 빛을 머금었을 돌들. 이 세상의 그 무엇이든 오랜 시간의 빛이 축적되면 이곳에 있는 저 돌들만큼이나 시간에 저항할 수 있는 신비로운 색깔을 띠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고통을 받으면 그만큼 더 행복할 권리를 얻게 될 것이다.
나는 원래 자연물에 빗대어서 인간사에 교훈을 주는 그런 말들(예를 들자면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같은 말)을 싫어하는데, 카뮈의 생각과 일치할지도 모를 위 문장들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다.
p. 70 나는 인간이라면 (...) 자신의 운명과 정면 대좌한 고대인들의 시선 속에서 빛나고 있는 저 순수함과 진실을 다시 찾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들은 자기의 젊음을 회복한다. 그러나 그 젊음은 죽음을 껴안으면서 다시 찾아지는 젊음이다. (...) 그리하여 이제 나는 문명의 참다운 단 하나의 진보는 (...) 바로 스스로 뚜렷이 의식하는 죽음을 창조하는 것임을 분명히 느끼게 된다. -『결혼, 여름』, 29쪽
p. 72 죽음이란 닫혀버린 문, 추악한 모험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기껏 생명 자체의 무게를 덜어내는 것이 아닌, 단지 생명의 무게 그 자체를 최대한으로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 그런 의미에서 제밀라는 그에게 죽음을 준비하게 하는 장소, 죽음에 대한 명상을 통해 명료한 정신으로 죽음과 대면하는 장소다. “내 명징한 의식을 극한에까지 밀고 나가서 나의 모든 아낌없는 질투와 공포와 더불어 나의 종말을 응시하고 싶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비로소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모든 가능성이 펼쳐지는 ‘자신의 왕국’을 발견하는 것이다.
카뮈는 확실히 죽음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그에게 있어서 죽음은 그 무엇도 아니고 단지 “자신의 왕국”을 발견하기 위한 수단인 것처럼 보인다. 명징한 정신으로 죽음을 대면함으로써 생(生)의 무게를 최대한으로 누리는 것. 그리고 비로소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
p. 76 폐허의 왕국 (...) 우리는 교훈을 찾는 것도 아니요, 위대해지는 데 필요하다는 그 어떤 쓰디쓴 철학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태양과 입맞춤과 야성의 향기 외에는 모든 것이 헛된 것으로 여겨진다. (...) 여기에 오면 나는 질서나 절도 따위는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해버린다. 나를 온통 휩싸는 것은 자연과 바다의 저 위대한 무분별의 사랑이다. (...) 고대 광장의 포석들 사이로 향일성 식물이 붉고 흰 머리를 쳐들어 올리고, 붉은 제라늄은 옛적에는 가옥이요 사원이요 공공 광장이던 자리에 그들의 붉은 피를 쏟아붇는다. 폐허는 다시금 돌들이 되어 인간의 손길로 닦인 저 반드러운 손때를 이제는 다 버리고 자연 속으로 되돌아와 있다. (...) 무너지게 마련인 사물의 중심으로 폐허를 다시 인도해주는 저 심원한 힘에 복종하는 것 이외에 다른 마음 쓸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결혼, 여름』, 14쪽
카뮈의 사상을 대표하는 키워드인 ‘반항’은 부조리의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생은 무의미하며 부조리하다. 그러나 바로 그래서 생을 사랑하게 된다. 카뮈는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생이 무의미하며 부조리하다면 생을 미워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왜 자살하지 않는 것인가? 나는 오래전부터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비약이라고 생각했다. 부조리에서 사랑으로 넘어가는 그 사이에 비약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비약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열심히 타이핑한 위 문장들에게서 실마리가 느껴진다. 옮겨 적기엔 너무 길어서 축약하려 했지만 도무지 버릴 문장이 없었다. 카뮈는 “태양의 입맞춤과 야성의 향기”를 느끼고, “자연과 바다의 저 위대한 무분별의 사랑”을 느끼며, 대지와 돌들에 “붉은 피를 쏟아붇는” 꽃들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그 “이외에 다른 마음 쓸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기에 이른다. 비약을 비약처럼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카뮈는 체화했던 것이다. 바로 그것을 두고서 카뮈는 (『결혼, 여름』에서) 자신과 자연과의 “결혼”이라고 지칭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