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 그리고 PM에게 전문성이란
브런치에 글을 쓰지 않았던 지난 2개월은 입사 이래로 회사에서도, 퇴근 후에도 가장 챌린징했다.
회사에서는 서비스 기획자의 롤과 동시에 처음으로 PO 혹은 PM(그 무엇이라 부르든)의 롤을 담당했다. 많은 부담과 책임감을 견뎌야 했지만, 수직적인 구조의 대기업에서 2년차 주니어에게는 잘 주어지지 않는 귀한 기회였다. 이 프로덕트는 아직 진행 중이고, 내년 상반기에 서비스가 릴리즈되기 전까지는 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 일을 되게 만들게 하기 위해 수반되는 회사 내의 역학관계나 본질적인 PO의 롤에 대해서 느낀 바는 브런치에 차차 풀어나가려고 한다.
내가 언제까지고 저연차 기획자일리 없다
퇴근 후가 챌린징했던 이유는 대학원을 지원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연차가 쌓이면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면 경험은 점차 풍부해지고, 회사 내에서 '적당히' 업무할 수 있는 일종의 관성과 노하우는 쌓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반복적인 운영업무와 단발성의 기획 업무 이상으로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기획자로서 전문성이 필요하다.
회사의 기조가 Digital Transformation, 그리고 데이터 드리븐한 프로덕트 중심으로 집중되면서 점차 주요한 theme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그 주제들은 소위 말해 '잘 나가는' PM 혹은 PO들이 맡는다. 그들은 대부분 석박사 출신의 전문가이고, 유사한 분야에서 성공경험이 있어 회사가 모셔온 귀한 인재들이다. 당연히 나도 언젠가는 그런 역할을 맡고 싶다.
곧 3년차에 접어드는 모바일 앱 서비스 기획자로 일하면서 가장 전문성을 키우고 싶은 영역은 데이터 분석이다. 누구나 데이터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지만 모두가 데이터를 잘 읽고 활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고객 데이터, 매출 데이터, 상품 메타 데이터, 모바일 앱 서비스 사용성 지표 등 다층적인 빅데이터가 산재되어 있다면 패턴을 읽고 예측하기란 더더욱 어려워진다. 가공되지 않은 빅데이터 속에서 제대로 방향을 읽기 위해 전문적인 데이터 분석 역량을 기르고 싶었다.
데이터 사이언스를 배우겠다고 결정한 이유
신규 서비스를 런칭할 때에는 (당연하게도) 참고할 수 있는 동일한 스키마의 사내 데이터가 없다. 신규 서비스에 맞는 가설을 새롭게 세우고, MVP 프로덕트를 시장에 빠르게 출시하고 검증하는 lesson and learn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신규 서비스의 핵심 타겟 고객을 규정하는 일부터 실제 고객들이 반응하는 코어 서비스 feature를 설계하는 일, 그리고 비즈니스 관점에서 궁극적으로 매출을 일으키고 관련 지표를 개선하는 일에는 모두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과거 데이터를 보고 간단하게 분석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직장인이라면 모두가 사용하는 엑셀로, 학부 때 배웠던 기초 통계학 내용을 더듬어서 서비스 운영 전과 후의 주요 지표의 변화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noise를 제거하고 정말 데이터를 맞게 분석하고 있는지를 고려한다면 문제상황은 한층 복잡해진다. 지표의 변화 요인이 정말 신규 서비스라는 단일 요인으로 인한 것인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산업군의 특성상 서비스 운영 전의 한 달과, 서비스 운영 후의 한 달은 전혀 다른 30일이다. 계절의 변화나 긴 휴일의 유무 등으로 유저의 서비스 이용패턴 자체가 변할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자사의 신규 서비스와 별개로 진행한 프로모션이나 경쟁사의 서비스 등으로 인한 변화일 수도 있다.
이 때문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도출한 데이터 분석 결과를 나 자신도 100% 신뢰하기가 어려웠다.
더욱 어려운(혹은 불가능한), 그러나 중요한 지점은 바로 미래 데이터 예측이다. 직감이나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머신러닝을 활용해서 근거 있는 신규 서비스를 기획하고 싶다. 현재의 기획 방식이 결과적으로 '차이가 날 것'이라고 기대되는 신규서비스 A와 신규서비스 B를 A/B 테스팅으로 실험하고 데이터를 사후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라면, 머신러닝을 통해서는 신규서비스 A와 신규서비스 B를 기획하는 과정에서부터 데이터를 사용해 설계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신규 서비스에 가장 기민하게 반응할 고객 세그먼테이션부터 서비스 성장의 추이까지 예측할 수 있다.
대학원 선택의 기준
1. 자대 대학원은 최후의 보루 - 새로운 둥지를 찾자!
나는 자대에서 '모범생'으로 졸업했다. 최우수 성적 그룹에게 부여하는 숨마쿰라우데 칭호가 적힌 졸업장을 받았고, 그만큼 학업과 extra curricular에 열정을 쏟아내며 대학교 시절을 보냈다. 진심을 다했던 만큼 졸업 이후에도 교수님과 조교님들과 친밀하게 교류하는 편이다. 지금까지의 직간접적인 경험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상대적으로 자대 대학원으로의 입학은 타대 입학보다 수월한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교육 환경에서 새로운 교수님께 다른 방식으로 가르침 받으며 경험의 폭을 넓히고 싶었다. 비록 합격 가능성은 떨어지더라도 자대가 아닌 타대학원에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2. 1.5년~2년 내로 졸업하는 컴팩트한 커리큘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 대학원 진학의 목적이 아카데믹만에 있지는 않다. 궁극적으로는 실무에 발을 딛고, 실제 비즈니스 현장에서 적재적소로 이론 지식을 활용하는 현장 전문가가 되고 싶다.
따라서 2.5년의 커리큘럼을 제공하는 대학원은 모두 배제했다. 나에게 필요한 이론을 효율적이고 빠르게 교육하고, 새로운 기반이 되어줄 수 있는 대학원을 찾았다.
3. 해당 분야에서 최고의 대학원
대학원에 진학한다는 것은 교육을 받는 의미 그 이상으로, 새로운 인간관계와 경험의 시작이다. 성장하기 위해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은 나보다 잘난 사람들이 많은 집단에 포함되는 것이다. 대학원의 네임밸류나 순위가 모든 것을 증명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객관적으로 우수한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직장인이 다닐 수 있는 특수대학원은 졸업까지의 비용이 평균적으로 3,000만원~4,000만원에 달하기 때문에, 나에게 그만큼의 가치가 있어야 했다.
사실 제일 우선으로 희망하는 대학원은 매년 상반기에 딱 1번만 모집을 받아서 이번 하반기에는 지원이 불가하다. 따라서 이번에는 1~2번의 기준에 부합하는 단 하나의 대학원을 선정해서 지원했다.
데이터 특수대학원, 돈 내도 못 들어가더라
현실적으로 직장인들이 다니는 특수대학원(A.K.A 야간대학원)에 대한 인식은 그렇게 좋지만은 않은 듯 하다. 나 역시 대학원 진학을 제대로 알아보기 전에는 '돈만 내면 들어갈 수 있는' 대학원이라는 인식이 없지않아 있었다. 물론 대학원 자체의 네임밸류와 과에 따라 입학 경쟁률은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데이터사이언스 관련 학과의 경쟁률은 최근 몇 년간 점차 높아져 내가 지원한 대학원의 경우 22년 전기 입학 경쟁률이 8:1에 육박했다.
대학원 입학처로부터 면접 대상자에 대한 메일을 받자마자 경쟁률을 셈해 보고, 기운이 쭉 빠졌다. 직장인을 대상으로 하는 특수대학원의 특성상, 여러 지원자들 사이에서 2년차인 나의 경쟁력이 약할 것이라는 건 자명했다. 실제로 작년에 해당 대학원에 지원하고 합격한 후기들을 찾아보니 과장, 부장급 이상의 지원자가 많았다. 설상가상으로 이미 업무에서 직접 머신러닝을 활용하고 있는 지원자의 후기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신입 공채에서 중고 신입을 뽑으면, 학부를 막 졸업한 신입은 도대체 어디서 경력을 쌓냐'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머신러닝 전공책으로 알고리즘 이론을 공부하면서 야심차게 면접을 준비했지만, (예상했던 대로)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한 사람당 5분 정도의 시간이 주어져 나를 어필할 수 있는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면접 질문들 역시 내 성장 가능성보다는 현재 상태를 체크하는 질문들이었다. 짧은 업력과 경험을 보완하기 위해 몇 개월간 혼자 공부해왔던 것들, 그리고 앞으로 대학원에서 배우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는 질문을 받지 못했다. 내가 답변을 잘 못 해서 떨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합격의 모든 원인을 마냥 높은 경쟁률에만 돌리지는 않겠다. 뼈저린 교훈이 있다면 나는 떨어질 이유가 있어서 불합격한 것이 아니라, 붙을 이유가 없어서 불합격했다는 사실이다. 나의 성장 가능성과 배움에 대한 의지가 그 이유가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대학원에서는 그걸 별로 궁금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혹은 다른 지원자들의 이유가 더욱 강력했겠지 싶다.)
내가 가진 강점들을 해당 대학원에서 우수하게 봐 주지 않았다는 것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나라는 사람과 해당 대학원의 핏이 잘 맞지 않았다는 생각도 든다. 특히 이 대학원은 공학 석사 대학원으로 보다 테크니컬한 이론을 중심으로 하는 커리큘럼을 갖고 있어서, 나처럼 PM, PO 커리어를 밟고 있는 경영대 졸업생에게는 100% 적합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은 들었다. 따라서 이번에 지원했던 이 대학원에는 불합격했지만 기획 실무자로서 나의 자질이나 주니어로서의 성장 포텐셜이 결코 부족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목표로 하고 있는 대학원은 내년 상반기에 신입생을 모집한다. 앞으로 남은 반 년 정도의 시간동안 반드시 나여야 하는 강력한 이유를 만들고 싶다.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것을 느낀 지난 2개월이었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많이, 지금까지보다 큰 폭으로 성장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