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는 고통받는 난민들을 위한 국제 사회의 지원은 당연히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구호품을 가로채 전쟁을 치르기 위한 무기를 사는 데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난 뒤에도 지원을 이어 나갈 수 있을까요? 우리의 원조가 오히려 분쟁을 장기화시키고 있었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말입니다.
2. 그렇다고 고통과 절망에 빠진 민간인들을 마냥 외면할 수도 없습니다. 대부분이 불법으로 전용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마저도 중단되어 버리면 수천 명의 아이들이 즉각 굶주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돕지도 못하고 멈추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3. 실제로 인도주의 분야에서 이런 딜레마가 자주 발생했습니다. 1994년 르완다 내전에서 한 난민 캠프는 피난민 틈에 섞여 들어간 군인들로 인해, 사실상의 군사 기지처럼 변해버렸다고 합니다. 국제사회가 지원한 구호품은 군벌에 의해 통제되었고, 그들은 난민들에게 식료품을 나눠주는 대신 자신들의 무기를 사는 데 그 돈을 썼으며 이는 이후 1, 2차 콩고 전쟁의 원인이 되어 더 많은 인명 피해로 이어졌습니다.
4. 당시 국경 없는 의사회는 '선의가 만든 비극적인 사태'에 더 이상 동참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자이르 캠프에서 의료 지원을 중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생명을 최우선의 가치로 마지막까지 의료활동을 이어왔던 그들이, 난민들의 건강을 외면하고 철수한 것은 국제사회에서 큰 논란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윤리적 딜레마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알려져 있습니다.
5. 인슐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왜 원조의 역설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냐고요? 사실 이 딜레마는 비단 인도주의 분야뿐 아니라 당뇨치료를 권고받은 환자가 자주 맞닥뜨리고 혼란에 빠지는 상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당뇨 환자는 '외부 지원(당뇨약/인슐린)이 문제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외부의 지원을 받는 것을 고민합니다. (약은 몸에 나쁘다는 식의 오해로 촉발됩니다)
6. 다시 최초의 이야기로 돌아가 인슐린이 개발되기 전 기아요법만이 유일한 치료였던 시대로 가보겠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원조의 역설에 대입해 보면 기아요법은 “원조품(포도당)이 불법으로 전용되어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고혈당)으므로 아예 원조를 중단하자.”라는 주장의 극단적인 실행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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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원조를 중단하였으므로 문제(고혈당)는 더 이상 생기지 않았을지 몰라도, 이제 우리는 인슐린, 즉 김 여사가 하는 일이 단순히 혈당을 내리는 것만이 다가 아님을 알기에 그때의 치료가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당뇨 환자들은 조직이 더 이상 재건되지 못한 채 (동화작용 불가, 세포의 성장과 재생, 단백질 합성에 인슐린의 역할은 절대적입니다.) 제 살을 야금야금 파먹으며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로 지내다가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인도주의적 지원이 멈춰 버린 난민들의 운명처럼 말이지요.
8. 진료 현장에서는 당뇨약이나 인슐린 치료를 권유받은 환자분들이 원조 없이 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다고 낙관하는 경향을 자주 마주합니다. 더 안타까운 경우, 원조가 불러올 부작용에 너무 몰입되어 "도움을 받을 바에는 차라리 숭고하게 자폭하는 것이 낫다"는 그릇된 선택을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9. 이런 비극적인 사태가 발생하는 이유로는, 전쟁을 일으킨 주범이 '과하게 늘어난 지방 세포와 기능을 잃은 췌장'이라는 사실이 잊히고, 인슐린 (쿠데타를 당한 무능한 정부)에 원죄가 있다고 잘 못 생각하는 것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10. 망가져가는 몸 상태를 가까스로 조절하기 위해, 엇나가거나 빈약해지던 자식들(근육)을 챙기느라 고생하던 김 여사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면, 이미 인슐린 저항성이 극도로 진행되어 김 여사만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게 된 마당인데, 돈 좀 벌어온다며 집안일에는 아무 신경도 쓰지 않던 남편이 이제 와서
11. "당신(김 여사)이 애들을 잘 못 키운 탓에 아이들이 저렇게 삐뚤어졌으니 이제 더 이상 생활비 안 줘!"라고 극단적인 해법을 내리고, 김 여사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억울한 상황과도 같다고 느낍니다. "너희 정부가 무능한 탓에 난민에게 전해질 구호품을 군벌들이 독식하고 있으니 이제 국제사회는 지원을 끊겠어!"가 난민에게 해답이 되지 않는다는 걸 충분히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12. 저항성이 악화되며 당뇨로 한발 한발 다가서는 상황에서의 인슐린의 고군분투를, 다름 아닌 김 여사라는 안주인에 빗대 설명한 것도, 우리는 인슐린을 탓할게 아니라, 측은히 여겨야 한다는 제 개인적인 바람이 투영되었다는 걸 고백합니다.
13. 사실 당뇨는 자연스러운 노화 과정 중에 하나라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저는 당뇨라는 소식을 전해 듣고 심란해하는 환자분께 ‘나를 포함한 모두는, 한 명도 빠짐없이 언젠가는 모두 당뇨환자가 된다.’, ‘다만 진단받기 전에 사망할 수는 있다’라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14. "이제는 약을 드셔야 한다"는 소식이 마치 파산선고를 받은 것만큼이나 충격적이고 절망하시게 느껴지시는 것을 공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적절한 치료를 미루고 당뇨를 조절하고자 한다면 췌장의 베타세포는 더욱더 고갈이 가속화되고, 조절되지 않는 혈당으로 인한 합병증은 갈수록 심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15. 그리고 인슐린 치료를 권유받았다면 고군분투한 김여사가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더 이상 활동을 그만둬 버리려 (췌장에서 인슐린 분비가 멈춘) 한다고 상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우리 몸의 어느 조직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무한정 기능 하는 기관은 없기에 췌장의 베타세포도 언젠가는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16. 국제 원조가 난민에게 잘 전달된다면 군벌의 통제력이 약화될 수 있듯, 적절한 시기의 인슐린 투여는 지쳐가는 췌장 베타세포에게 귀한 휴식을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적절한 시기에 인슐린 주사 치료를 시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17. 국제단체는 인도주의적 목표와 정치적 현실 사이의 균형을 찾기 위해서 현물지원이 아닌 현금 지원을 한다던지, GPS 추적을 통해 구호물품 운송 차량을 추적한다던지의 방법을 택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로서 군벌의 통제력을 약화시키고, 지원의 흐름을 투명하게 만들며, 지원이 궁극적으로 평화 구축에 기여하도록 발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원조를 멈추지 않는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18. 당뇨약도 간과 근육의 인슐린 저항성을 개선시키거나 포도당 생성을 억제하고, 위장관에서 포도당 흡수를 지연시키거나 신장에서 과도한 포도당 재흡수를 막아 배설을 유발하는 등의 여러 똑똑한 방법으로 혈당을 조절하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용기를 전해드리기 위해 당뇨약과 인슐린 주사제의 발전에 대해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