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건강을 신경씁니다.
사우나 입구에 부착된 주의 사항을 살펴보면 "과음했거나 수술 직후, 또는 고혈압 약을 복용 중이라면 이용을 삼가세요."라고 적혀 있습니다.이 문구를 통해 고혈압 약을 드시는 분들이 주의하실 내용에 대해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요즘처럼 기온이 올라가서 더위를 느끼면, 우리 몸은 체온을 낮추기 위해서 피부쪽에 혈류량을 늘립니다. 말초 혈관에 머물게 된 혈액들로 얼굴은 벌겋게 변하고 땀도 흐르게 되지요. 빠져나간 혈액들 때문에 중심 혈관 쪽은 되려 여유가 생깁니다. 커다란 물주머니 가장자리에만 물이 머무른 것을 상상하셔도 좋습니다.이게 과해지다 보면 중심 혈관에 혈류가 조금 줄어듭니다. 그런데 뇌는 상당히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기관이라 자신에게 올라오는 혈류량이 아주 소량, 그러니까 1%만 감소하여도 참지 못하고 알람 사인을 보냅니다. 170층 (성인 키 170cm)에 사는 펜트하우스 악덕 건물주가 "이거 샤워기 수압이 왜 이래!?" 라며 관리사무실에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전화하는 걸 상상하시면 좋겠습니다.
중요기관인 뇌에서 "나 지금 피가 모자란다.'라고 하면 몸은 허겁지겁 보내 드릴 혈액량을 늘이기 위한 작업에 돌입합니다. A.말초 혈관을 수축시켜 중심 혈관으로 피가 돌아오게 하고, B.심장을 닦달해서 피를 올려보내도록 빨리 뛰게 하며, C. 다른 호실로 가는 수도관은 잠그고 뇌에 가는 수도 밸브만 열어 핵심 장기로 피를 몰아줍니다. 우리는 목도 마릅니다. 사우나에서 나가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혈압약은 위 신체의 '혈압을 높이는 기능'을 억제합니다. 예를 들어 칼슘채널차단제(CCB, 대표적으로 노바스크)는 말초 혈관을 확장하고, 심장의 수축력을 줄임으로써 중심 혈압을 낮추고, 알도스테론 작용제(ARB, 대표적으로 디오반) 는 나트륨과 수분의 재흡수를 억제하여 순환 혈액량을 감소시킵니다. 이뇨제는 물주머니의 배수 구멍을 열어둬서 물이 쫄쫄 밖으로 흐르게 합니다.자, 다시 사우나 상황으로 돌아가서, 최근 수술로 상대적인 빈혈 상태이거나, 과음을 해서 말초 혈관에 피가 더, 더 몰려버렸다면 혈액 회귀가 늦어집니다. 물주머니 중앙으로 물을 모아야 하는데 잘 안되는 겁니다. 최악의 경우 실신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목욕탕은 미끄럽잖아요. 그래서 주의하라고 적혀 있는 겁니다. 혈압약을 드시고 있는 분들도 '혈압을 높이는 기능'을 억제하니 역시나 주의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몸에서 생리적으로, 그것도 위급할 때 쓰려고 만든 작용을 건들인다니 찝찝합니다. '혈압약은 (혹은 양약은) 몸에 좋지 않아' 그러니까 운동하고, 살 빼고, 뭐 하고 해서 약은 먹지 말고 내가 내 몸을 잘 관리하자 하고 생각하실 법합니다. 맞습니다. 실제로 혈압약은 좀 별롭니다.저는 환자분께 혈압약이 트럭이나 버스에 달린 '속도제한장치'와 같다고 설명해 드리는데, '속도제한장치'를 달았다 보니 몸의 이곳저곳에서는 불편하다고 아우성칩니다. 좀 졸리고 나른하고 의욕도 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좀 답답합니다. 아니 이 차(내 몸), 좀 구형모델이지만 (93년식~73년식) 못해도 (아직은) 150km는 너끈하게 쏠 수 있는데 꼭 90km에 맞춰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졸음운전이 더 위험한 거 아냐?"라며 장치를 몰래 끄고 싶습니다.
게다가 몸의 최고 성능을 유지하려면 확실히 높은 혈압이 유리합니다. 역도 세계신기록을 세우는 선수들은 순간 혈압이 못해도 300/200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그 무게를 들 수가 없어요. 터지지 않냐고요? 터질 수도 있지만 버텨지는 겁니다.문제는 평상시에도 그렇게 살아야 하냐는 말입니다. "감독님의 전성기는 언제죠?" "전 지금입니다."라는 강백호식 태도로 살지는 않으실 거잖아요.
최고 성능을 유지하려다 보면 다른 곳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오래된 수도관에 무리하게 수압을 올리면 누수가 생기고 바닥에 물이 흥건합니다. 다행히 기술이 좋아져서 엘리베이터나 베란다 창은 쉽게 갈 수 있지만 (간이식도 되고, 눈이 나쁘면 안경도 쓰고) 이놈의 수도관은 워낙 긴지라 (혈관을 죽 이으면 지구 둘레의 두 바퀴 반에서 세 바퀴에 해당하는 길이) 수리할 엄두를 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의사는 이렇게 욕을 먹습니다.
“아니 난 건강해지고 싶어서 찾아갔는데 자꾸 뭐가 더 안 좋아져! 이거야 원!”
(아니 난 차 고성능으로 만들고 싶어서 찾아갔는데 왜 강제로 에코모드로 맞춰! 노말보다 답답하잖아!)
네 맞습니다. 죄송하게도 의사는 활력을 증진하고 없던 힘을 나게 하고 회춘하게 하고 정신이 멀쩡해지게 만드는 기술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무탈하게 되도록 길게 살려드리는 쪽에 학문의 목적이 있습니다. 차를 스포츠 모드로 움직이게 하는 것은 못 하지만 에코 모드로 연비 좋게, 오래오래 쓰게는 만드는 방식을 선호합니다.'가늘고 길게' 살게 만들어 드립니다.
하지만 100km 도 생각해 보면 느린 속도가 아닙니다. 휴게소에서 시원하게 볼일 보고 핫도그 하나 사 먹고 다시 고속도로로 들어갈 때면 숭숭 달리는 차 사이로 진입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130/90도 낮은 혈압이 아닙니다. 젊고 건강한 마른 분들은 80/50으로도 잘만 지내십니다. 200/130으로만 발기가 된다면 그건 발기를 하면 안되는 겁니다.
씁쓸하시다고요? 이젠 씽씽 못 날아가니 슬프시다고요? 아닙니다. 수압 좀 약해도 사람이 다 살아지게 되어있습니다. 녹물이 나오면 필터 달고도 살고요. 적응 다 됩니다. 어쩌겠습니까? 새 차를 사듯 새 몸을 사지 못하는 한, 앞으로 이 몸으로 최소 수십 년은 더 써야 하는데 어쩔 수 없지요.
처음으로 돌아가서, 그래서 혈압약을 드시는 분들은 여름철에 꼭 수분을 충분히 섭취하셔야 합니다. (물주머니에 물을 더 담으세요!)더불어 갑작스러운 자세 변화 (번쩍 일어나기 등) 는 탑 층으로 물을 올려보내는 데 애로사항이 있을 수 있으니 천천히 움직이시고 어찔한 기분이 드시더라도 당황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심할 경우 여름철에는 단기간만 혈압약 용량을 줄여 처방해 드리기도 하니 주치의 선생님과 상담하시는 것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