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서울,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나의 방에서 기록하는 이야기
중소도시를 벗어나 서울로 올라왔다. 첫날은 셰어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짐 풀고, 동사무소 가서 부랴부랴 전입신고부터 했다. 그러곤 또 부랴부랴 영화관으로 달려가 딱 그날 개봉한 영화를 보고 나와서, 또 부랴부랴 제주도에서 함께 일하고 먹고 웃으며 지냈던 언니 동생들을 보러 달려갔다. 그러곤 집에 돌아와 기절. 참 정신없는 첫날이었다.
둘째 날이 되었다. 분명히 아침에 눈을 떴는데, 방 안이 온통 새카맣다.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한다. 오전 8시 50분이다. 이게 맞나 싶어 부엌으로 나가보니 싱크대 위 조그만 창 너머로 파란 하늘이 얼핏 보였다. 그토록 찬란한 서울 강남 한복판에 빛 한줄기 들어오기 버거운 집이라니, 내가 여태껏 상상하고 알고 있던 서울의 이미지에 붓을 하도 빨아서 칙칙해진 물로 그림을 다시 칠하는 기분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찝찝해지는 기분을 떨쳐버리려고 하려고 했던 일들을 시작했다. 먼저 서울시 청년 월세지원금을 늦지 않게 신청하고, 도착한 짐들을 하나 둘 풀기 시작했다. 흘러넘칠 것 같았던 짐들이 수납공간에 미리 짜 맞추기라도 한 듯 완벽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날은 그거 하나로 만족했다.
3일 차 되는 날, 이모부의 파킨슨 검사를 위해 엄마 아빠가 이모와 이모부를 모시고 서울로 올라오셨다. 올라오시는 김에 나도 같이 이모랑 이모부를 보겠다고 떼를 써서 같이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자다 일어나 번쩍 눈을 떠보니 방안이 여전히 칠흑 같았다. 아차 싶어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약속시간보다 30분이나 늦어있었다. 이러다 첫 출근날에도 이러면 어쩌나 하는 마음을 뒤로하고, 서둘러 준비하고 병원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이 나이쯤 되면, 주변에 계신 어른들이 세상을 뒤로할 날이 가까워짐을 느낀다. 동시에 세상에 던져져 이제 막 치열하게 사회생활을 시작할 법한 나이이기에, 자칫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동안 얼굴도 자주 뵙지 못하고 지내던 어른들을 하나둘씩 떠나보내기가 쉬워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굳이 이모부 검사에 따라나선 것도, 일부러라도 얼굴 뵐 수 있을 때 더 뵈어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병원 입구까지 아빠가 마중을 나와있었다. 아빠가 나를 보자마자 손을 내밀었다. 원래는 만나도 손을 잘 잡지 않던 부녀 사이였는데, 서울 한복판에서 만나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덥석 아빠 손을 잡았다. 그렇게 아빠를 따라간 곳에는 엄마와 이모, 휠체어에 앉아 잠이 들어버리신 이모부가 계셨다. 이모부는 경상도 사람답게 츤츤거리며 이모부를 깨웠다. 내 기억 속 이모부의 모습은 역시 경상도 사람답게 말수가 적고, 근엄 진지한 포스를 물씬 풍기던, 그러면서도 이모부 댁에 오고 갈 때면 늘 따뜻하게 배웅해주시던 분이었다. 하지만 이제 내 눈앞에 계신 이모부는 모진 세월을 지나 힘없고 초점 없는 눈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런 이모부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을 하다, 그저 생긋 눈으로 인사하고 웃고 있기로 했다.
미쳐버린 물가에 병원 푸드코트도 한 끼 식사에 기본 8,000원 하는 시대가 와버렸다. 우리는 각자 먹을 음식을 주문하고, 비싸도 맛은 좋다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아빠는 나보고 시골 촌뜨기가 이제는 서울 한복판에 올라와 산다며 출세했다며 농담을 했고, 옆에 계신 이모부는 열심히 미역국을 드셨다. 나는 후식으로 비싼 음료 대신, 옆에 있는 ㅂ목장 아이스크림을 먹자고 했다. 맛은 기대 이상이었고, 별 관심 없어 보였던 이모부도 한 입 드시고는 너무 맛있으셨는지 그릇을 열심히 비우셨다. 나는 '역시 병원 직원분들도 일부러 와서 사 먹는 거 볼 때부터 알아봤다'며 뿌듯해했다.
검사가 끝나고 나는 다시 집으로 내려가는 부모님과 이모, 이모부를 배웅했다. 그러고 집 근처 교보문고로 향했다. 도보 20분 채 안 되는 거리였는데, 같은 길이의 거리여도 그간 걸었던 거리와는 밀도부터가 달랐다. 눈 닿는 곳마다 나의 시선을 뺏는 화려한 건물과 파사드가 흘러넘쳤고, 쉴 새 없이 걷는 와중에 내 눈이 쉴만한 곳은 없었다. 온 사방이 널찍널찍한 도로에, 인도에, 지하철에, 모든 것이 충분한 크기로 보이는데, 퇴근시간이 다가오자 골목 하나하나에도 사람과 차가 가득했다. 누군가 한국=서울이라고 했듯, 한국사람들은 다 여기에 있는 게 분명했다. 나에게 서울의 한산한 거리는 지방 소도시의 붐비는 거리 급이었다.
나는 늘 서울이 아니어도 좋아, 한산한 곳에서 집값 걱정 크게 안 하고, 작은 것에 만족하며 살 거며, 안 그래도 서울로의 인구집중이 너무 심한데, 나는 앞장서서 반대로 가겠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어쩌다 보니 나도 서울에 와있다. 그리고 알고 보면 모두가 어쩌다 보니 서울이라고 한다. 과연 어쩌다 보니의 정체가 무엇일지, 하나로 단정 지을 수 없지만, 좋은 기회들이 흘러들 가고, 지금 사회가 흘러가는 방향이겠거니 한다. 그렇게 서울로 흘러오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우리 세대는, 어쩌다 보니 다들 서울에 와있다.
기본으로 깔려있는 나의 청개구리 마인드는 서울의 것을 부정하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이곳에 적응하다 보면 또 나도 모르게 서울이 아닌 다른 도시의 모습과 속도, 그 풍경들을 멀리하고, 이곳에 적응하고, 이곳에서 나의 삶을 영위할 생각뿐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도 다 그러려니 싶었다. 그래도, 내 마음의 소리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러다 다 죽어..."
시골 청개구리는 이 흐름에 굴복하지 않을 테야.
조심스럽게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