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클 집에서 먹은 치킨 앤 토스트
뉴욕 시티에 산다고 다 같은 번지르르한 맨해튼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뉴욕 주 뉴욕 시의 맨해튼이라는 작은 공간에 격자무늬로 수많은 빌딩들이 빼곡히 세워져있기는 하지만, 어떤 곳은 화려한 빌딩과 정돈된 거리가 펼쳐지는 반면, 조금 몇 블록 떨어진 어떤 곳은 낡은 건물과 정돈 안된 지저분한 거리들로 맨해튼의 화려함의 이미지를 무색하게 한다. 하지만 이런 알록달록함 때문에 오히려 맨해튼은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는 다양한 매력을 품은 도시라고 불리는 것 같다.
맨해튼은 더 작은 구역들로 쪼개져 나름의 작은 다른 이름들로 불리고 있는데, 내가 사는 곳은 어퍼 웨스트(Upper West)로 말 그대로 '서쪽의 윗동네'이다. 학교 때문에 이곳으로 이사를 왔지만, 한 블록 떨어진 곳에는 센트럴 파크가 있고 (Central Park) 반대편 블록 끝에 허드슨 강이 펼쳐져 있어 여러모로 살기 아름다운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혼자 사는 대학원생의 주거공간으로 어퍼 웨스트만 한 곳이 없지만, 흔히 관광객이 기대하는 맨해튼 다운 맨해튼을 느끼려면 모두 아래로 내려가야만 한다.
원래에도 밑동네로 잘 안 내려가기는 했지만, 요즘은 귀차니즘이 더 심해져서 '더' 모든 것을 어퍼 웨스트에서 해결하려고 한다. 마침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기로 해서 처음에는 아랫동네의 이곳저곳을 생각해 보았지만,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하니 어김 없이 오늘도 어퍼 웨스트다.
그래도 새로운 음식점을 찾아보자 하던 차에 나의 레이더망에 걸린 음식점이 있었다. '메종 피클 (Maision pickle)'? 결정적으로 꽂힌 이유는 아무래도 긍정적인 평과 리뷰수이겠지만, 몇 달 전 다녀온 단골집 '제이콥스 피클스 (Jacob's pickles)'와 끝에 피클이 같다는 것이 확 끌렸다. 뭔가 정리하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미국 음식점과 '피클' 사이에 스토리를 만들어 보고 싶은 그런 요상한 생각도 들었다나.
구글은 항상 친절하게 어떤 스타일의 음식인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준다.
설명에 따르면 레트로 콘셉트의 미국 스타일의 레스토랑이라고 한다.
이 설명만으로 내 머릿속에 그릴 수 있는 음식들과 분위기란
'건강과는 조금 거리가 멀고... 엄청나게 많은 양과.... 비주얼적으로 이목을 집중시키게 만드는 음식? 극강의 단맛과 튀김 요리가 많은... 친절하고 활발한 서버들이 캐주얼하게 인사하는 그런 곳'이다. 그리고 클리셰처럼 대부분 등장하는 메뉴들로는
1) 프라이드치킨 + 와플/팬케이크
2) 맥 앤 치즈 (버팔로우와 블루치즈 조합은 어딜 가나 꼭 있더라?)
3) 수제 버거 앤 프라이
4) 치킨 윙과 치즈 소스
5) 각종 이상한 샌드위치들이 있다.
그리고 이곳도 바로 그런 클리셰 맛집이었다.
아는 메뉴들이 있었고, 이미 아는 맛이지만, 결국 시키는 건 역시 바로 그 아는 맛이지.
친구와 나는 한 가지는 치킨 앤 토스트 (여기는 와플도 아니고, 팬케이크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빵이잖아요?)로 실패 없는 메뉴를 시켰고, 다른 한 가지는 도전 정신을 위해서 감바스 느낌의 새우 요리를 시켰다.
"아메리칸 음식점의 단점은 말이야... 오히려 건강한 음식을 시키면 실패할 것 같아. 아메리칸 음식점에서 이탈리안 음식은 뭔가 신뢰가 안 가잖아?" 맥도널드에서 샐러드를 안 시키고 싶은 심리랄까.
뭔가 분명히 이탈리안, 분명히 프렌치 음식들을 피하고 피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눈을 돌린 곳이 시푸드 코너였다. 뭔가 이상한 조합이었지만 뭐 어때? 어차피 목적은 친구랑 수다 떠는 건데.
(나중에 다시 읽어봐서 알게 되었지만 감바스 새우스러운 음식도, '클래식' 쉬림프 스캠피 classic shrimp scampi 였다는 거)
넓은 매장과 다닥다닥 붙은 식탁들 사이에서 정신없이 친구와 수다를 떨다가, 주문한 두 가지 음식이 동시에 우리 눈앞에 등장했다. 비주얼에 압도당했으니 일단 사진부터 찍자.
오늘만큼은 건강에 대한 기대는 안 하기로 했기 때문에, 온전히 입과 눈만 충족시켜준다면 성공이다.
상상 가능한 비주얼이었지만, 실물을 보니 엄청난 양과 비주얼에 눈길이 간다.
아래부터 층층이: 메이플 버터와, 두껍게 썰은 식빵에 버터를 넣어 굽고, 그 위에 바삭한 튀김옷을 입혀 튀긴 버터밀크 치킨, 마지막 메이플 드리즐까지...
사실 메이플 시럽은 원래 미국 원주민들의 처음 만들어 먹기 시작한 음식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서구권 국가의 음식들이 원주민의 식재료들을 중심으로 발전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해 참 안타깝다). 메이플 나무 수액을 받아 끓이고 졸여서 얻어진 메이플 시럽은 미국의, 오늘날 뉴잉글랜드로 불리는 지역으로 들어온 유러피안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활용되기 시작됐다. 요즘은 전통 방식으로 메이플 시럽을 추출하지 않고, 기계화 돼서 더이상 원주민들 처럼 나무에 통을 매달아 받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이처럼 이주민의 나라인 미국은 원래 그 땅에 살고 있던 원주민의 음식과 이주민의 새로운 문화가 만나 탄생한 음식들이 많다. 미국 추수감사절의 대표 음식들인 메이플 시럽, 칠면조, 크랜베리, 옥수수, 피칸 파이들이 모두 다 원주민의 식재료와 향신료를 기본으로 만들어졌다면 더 이해가 쉬울까?
비슷한 식재료라고 해도, 치킨, 빵, 그리고 메이플 조합의 맛이 식당들 사이에서 다 동일한 것은 아니다. 치킨부터 맛을 보자. 메뉴에 의하면 이 치킨은 버터밀크 치킨이다.
보통 버터밀크(우유 발효)에 있는 산성 성분은 닭을 촉촉하고 부드럽게 하는 역할을 해서, 미국에서 닭을 재우고 튀기는데 많이 사용한다 (한국은 우유에 넣고 재우는데 말이다). 버터밀크 치킨의 또 다른 특징으로 단연 짙은 캐러멜색을 들을 수 있다. 버터밀크의 유당(설탕)은 튀김의 높은 온도에서 캐러멜라이즈드가 되고 이 때문에 일반 치킨 보다 더 짙은 갈색을 내게 되는 것이다. 오늘 먹은 치킨도 짙은 캐러멜색이었지만, 튀김옷이 너무 두꺼웠고,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닭고기도 촉촉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가운데에 깔린 빵을 한 입 먹는 순간 이 레스토랑에 대한 나의 평은 정해져 버렸다. 갓 구운 빵에서는 느낄 수 없는 냉동고 깊숙한 곳에서 풍기는 특유의 냄새가 느껴졌다. 아메리칸 식당에서 기대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은 다 갖추었지만 그 기대의 이상으로 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던 식당이었다.
미국 음식을 비하하는 뜻은 아니고, 그냥 캐주얼하게 비주얼로 승부하는 아메리칸 음식다운 식사였다고 지극히 주관적인 후기를 남겨본다. 그래도 이런 혀끝에서 오는 진한 단짠의 조합과 바삭한 튀김옷들의 향연, 그리고 캐주얼한 분위기 때문에 아메리칸 음식점은 시간이 지나면 또 찾게 되는 것 같다.
*보너스 편
버터밀크 프라이드치킨 앤 토스트의 영양 성분이 궁금한가요?
음식을 먹어보고 메뉴에 쓰인 재료를 바탕으로 추측해 본다면, 대략 1,500kcal 정도로 보입니다. 버터밀크 치킨은 성인 여자 두 손바닥 만한 크기를 기준으로 대략 600-700kcal가 되고, 중간의 빵은 얇은 식빵 6장 정도의 두께에 버터/달걀/설탕이 들어있어 추가적으로 600-700kcal가 또 들어갈 것으로 예상됩니다. 거기에 아래에 깔린 메이플 버터의 메이플 시럽과 버터는 1 테이블 스푼 당 50kcal, 100kcal가 들어가니, 얼추 그 정도 되지 않을까요?
식재료와 조리 방법을 보면 식이섬유, 비타민, 무기질은 거의 없고, 대부분 고지혈증을 비롯한 만성질환을 유발 할 수 있는 포화지방, 콜레스테롤, 중성지방, 탄수화물이 과다하게 포함되어 있어 양과 빈도를 조심해야 합니다.
나중에 찾아보고 알게 된 사실인데, 두 음식점 끝에 피클이 들어가는 이유는 바로 제이콥(Jacob)씨가 두 번째로 연 레스토랑이 메죵 피클이었기 때문이랍니다! 피클은 일종의 상징으로써 남부식 비스킷 샌드위치에 곁들여지는 맥주와 오이피클이 주는 분위기를 연상시키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주메뉴는 프렌치 스타일 딥 샌드위치라고 하네요! 저의 예상과 '완전히' 빗나갔죠 하하하.
모든 아메리칸 식당이 다 같은 메뉴를 시그니처로 정하지는 않을 수 있죠! 또 하나 배워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