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하다-
유난히 기분이, 마음이 엉키는 날이 있다.
아득하고, 거대하고, 무겁고, 영원 같은, 그런 추상적인 생각이 나를 짓누를 때가 있다.
머리로 피가 쏠리는 건지, 머리에서 빠져나가는 건지, 아무튼의 혈류가 느껴지는 시간이 있다.
이 감정은 쓴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글자는 눈으로 읽힌다. 내가 쓴 글은 타인의 눈을 통해 마음으로 간다.
하지만 느낌은 타인의 마음으로의 여정에서 무엇으로 변모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제대로 전하려면, 정확히 느껴야 한다.
고장 난 채 폭주하는 잔디깎이 기계처럼 위험한 감정을 써내려면,
가까이 가야만 한다.
그 사나움에 다가선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원래의 모양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이
흉측하게 덧입혀지고 또 해진 마음에서
반듯한 글자들을 뽑아낸다는 것은,
유난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일정한 박자로 차근히 글을 써내린다는 것은,
고요히 외로운 겉과, 괴성과 비명뿐인 속을,
합쳐내는 일이다.
감각만으로 짚어낸 이 낱말들을 읽고 있는 그대는,
이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흐름을 따라 내려온 그대는,
이제 표정을 잃은 나를 목격했는지 물음이다.
무어라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선 나를 보고,
본 것이 마음에 어떤 모양으로 남았는지 물음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터져버린 생각의 댐을 지나 하염없이 떠내려가던
무수히 많은 나를 끌어 잡아,
이 여백에 꼿꼿이 세워두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