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얼마만인가

by 예나

나라를 옮겨가는 이사를 감행하면서 무척이나 많은 짐을 버렸고, 버리면서 내가 또 뭘 사들이면 사람이 아니다 라고 생각한 게 불과 엊그제 같은데... 살랑살랑 가을바람이 불고 햇볕이 부드러워지는 계절이 되자 감춰뒀던 물욕들이 빼꼼 고개를 들었다. 나는 더위보다 추위를 좋아한다. 이유는 니트와 코트, 목도리와 양말 때문인데... 털실이나 모직으로 직조된 옷을 매일 입을 수 있는 계절이라 좋아한다는 게 좀 더 솔직한 이유다.


패딩이 제아무리 가볍고 따뜻하고 실용적이라도, 니트 위에 롱코트를 걸쳐 입고 목도리를 하는 그 특유의 결이랄까 그걸 대체할 수는 없다. 나지막한 컨버스화에 울 양말을 신는 포근함은 내게 어그부츠 등과 비교할 바가 못된다. 하지만 지난겨울을 이곳에서 지내본 결과, 내가 사는 곳은 목도리도 울 양말도 딱히 필요 없을 만큼 겨울이 온화하다. 한국에서 겨우 하나 있던 패딩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이유를 가장한 핑계는 어디에나 있게 마련. 지내다 보니 이곳에서의 겨울엔 도톰한 가디건이 필수다. 그리고 코트보다는 살짝 짧고 가벼운 울자켓 정도면 되겠다 싶었다.


미국 서부 특유의 유난히도 쨍쨍했던 여름이 물러날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나는 지난 몇 달간 단 한 번도 들춰보지 않았던 한국의 쇼핑 사이트들을 염탐하기 시작했고, 어느새 나는 이번 시즌에 출시된 울재킷과 가디건을 모조리 누르고 있었다. 다행히 조만간 한국에 잠시 들를 일이 생겨 큰언니 집으로 배송을 부탁하고 결제를 마치고 나니, 이게 도대체 얼마 만에 느껴보는 소비의 충만함인지. 역시 세상 가장 간사한 게 사람 마음 이랬다고, 적게 가지고 사는 미학을 꿈꿨던 나는, 또 비슷한 계열의 그 옷이 그 옷 같지만 나만 아는 디테일이 다른 옷들을 사고 있었다.


사실 휴직을 가장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해 준 것은 월급의 절벽이었다. 매달 꽂히던 급여가 없다는 사실이 가장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결국 그간 주류를 이루던 소비생활을 단칼에 줄여야 했고, 식비 외에 지출하는 돈은 0원, 극단적인 성향이 여기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무언가 자꾸 보면 사고 싶다는 마음이 들까 봐 아예 찾아보지 않았고, 사실 딱히 정해진 외출이 없는 내게 옷은 가장 필요하지 않은 무엇이 되는 것 또한 순식간이었다. 습관처럼 하던 일을 하지 않는 것 자체가 주는 묘한 박탈감과 스트레스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하다 보니 사적인 쇼핑을 하지 않는 것이 일상생활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일임을 차차 알게 됐고 이제는 꽤나 익숙하다.


온라인 상으로 결제를 마친 덕에 지금 당장 손에 쥐어진 무엇은 없지만, 조만간 입게 될 그것들의 옷매무새와 색깔을 상상하며 내가 가진 이것저것과 머릿속으로 매치해보는 작은 즐거움은 얻었다. 한국을 거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될 어느 겨울날엔가, 의외로 눈썰미가 탁월한 남편은 새 옷을 걸쳐 입은 나를 이리저리 보면서 또 말하겠지. 뭔가 못 보던 것들이 많이 생겼네...라고. 하지만 내가 영원히 휴직 상태의 나는 아닐 것이므로 나중에 입을걸 미리 준비했다고 그럴싸한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을 나도 눈에 선하다. 뭐 아무렴 어떤가. 결국 나 좋자고 사는 인생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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