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유용할 수 있는 시간이 한정적이던 직장인 시절에는 영화나 드라마 한 편을 보더라도 재미가 보장되거나 무언가 남는 것이 꼭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짙었다. 사실 어떠한 것을 접하기 전에 미리 그것이 나에게 미칠 효용을 계산하고 접근한다는 생각은 돌이켜보면 참 무의미한 것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선호하는 장르와 취향이 분명한 것은 개인의 기호일 수 있지만, 그것을 뛰어넘어 내가 선택하는 다양한 창작물들을 접하고 난 후에 스스로가 느끼는 실패감(?)을 제로로 만들기 위한 나의 노력은 이제와 생각하니 참 헛되고 헛된 일이었다. 아마도 제한적인 여유시간을 투자한 것에 대한 나름의 기회비용을 끊임없이 계산하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혼자만의 시간이 길어진 후로, 그간 보지 못했던 영화나 드라마를 찬찬히 밟아가는 중이다. 왜 이걸 이제야 봤을까 하고 끝난 후 멍하니 앉아있게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가끔은 그냥 봤다라는 것에 의미를 두어야 하는 그저 그런 것들도 분명히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예전의 나는 어떠한 것에 대해 좋은 것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또 싫은 것은 조목조목 이유를 들어가며 싫어했다. 사실 좋고 싫음에는 딱 떨어지는 이유가 없는 것이 대부분인데, 그 시절의 나는 왜 그리고 명료하고 딱 떨어지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몰두했는지 모르겠다.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랜만에 혼자 영화를 봤다. 묵직할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주연배우의 연기와 스토리는 그것을 뛰어넘었다. 아마 예전 같으면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장르였고, 이것을 본다고 했을 때 남편조차 조금 우울할 것이라고 미리 말해주었다. 하지만 결국 내가 스스로 보지 않으면 그 감흥이 얼마나 어떻게 다가올지는 모를 일이라는 생각에 주저 없이 영화관으로 향했다.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던 아서 플렉이 왜 광대의 얼굴을 한 조커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영화를 따라 찬찬히 따라가며 이해하고 공감했다. 그리고 분명히 나쁘지만 완전하게 악하다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주인공에 대해 한참을 생각하고 곱씹었다.
시간이 내게 준 여유가 삶의 여러 구석에 참 다양하게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을 하는 요즘이다. 그저 주어진 하루를 오롯하게 살아내는 것 만이 내가 생각할 수 있던 전부였던 시절을 지나, 수많은 형태의 이야기들을 접하게 되면서 결국 나에게로만 향하던 시선을 조금씩 '나를 비롯한 사람'에게로 넓혀가는 경험을 이제서야 한다. 결국에는 나라는 사람을 정확히 알고자 시작한 글쓰기 조차도, 수많은 타인의 이야기를 읽고 공감한 후에야 온전히 내 것을 써내려 갈 수 있음을 느리게 알아가는 중이다.
전에는 세상에 놓여진 사실이나 개인의 생각을 정리해둔 책에 손이 많이 갔다면, 요즘은 신간소설 소식에 더욱 귀 기울이며 제목을 기억해 두려 애쓴다. 조금씩 읽으면서 소설이 가진 특유의 매력을 알았다. 소설을 읽다 보면 나는 노인이기도 하고 중년 작가가 되기도 하며, 일곱 살 꼬마였다가 트럭 운전기사가 되기도 한다. 결국에 '나'를 잠시 놓고 그 이야기 속을 온전하게 통과해야 소설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꼭 어떠한 형태의 교훈이나 남는 무엇인가를 주어야 하는 의무는 없었다. 그저 내가 느끼고 생각하고 곱씹는 그 과정에서 나에게 남는 어떤 것들이 생기는 것일 뿐, 나는 책 읽기 조차도 동전을 넣으면 나오는 자판기처럼 툭 무언가 나오기를 한참 바라고 오랜 시간 그 앞에 서 있었다.
조금 여유로워진 나는 이제 어떠한 콘텐츠를 접하더라도 미리 셈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어떨까?라는 궁금증은 당연히 생겨나지만, 그 이후로 꼬리를 무는 어떠어떠해야 함에 대한 계산은 멈춘다. 재밌으면 땡큐고 그렇지 않아도 뭐 본 걸로 충분하지 라고 생각한다. 이왕에 이렇게 된 김에 지금의 내가 조금씩 확장되어 사람이든 사물이든 사건이든 어떠한 것을 접하더라도 겁내거나 지레 판단하지 않고 한없이 넓고 넓게 열려있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