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오늘 나는 참 예민해져 있었구나. 아침부터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고 수술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구나. 그런 와중에도 나는 간호사 몰래 빠져나가 노래를 들었구나. 나를 위로한다고 찾아오신 김종순 박사님과 송예진 후배님이 나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셨구나. 팔뚝에 주삿바늘을 꽂은 채로 이제하 선생님께서 직접 불러주신 모란동백을 듣던 그날 밤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너무 오랜만에 서울에 오니 갈 곳이 없다 두두는 늦은 세 시에 문을 연다고 한다 길은 공사 중이고 두두 안에는 작은 의자들이 천장에 매달려있다 마로니에 공원 공사용 간이 담장에는 연극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어있고 오래된 은행나무 그늘에는 사람들이 앉아있고 비둘기들은 부지런히 탁발수행을 하고 있다 오른발에 큰 상처가 있는 비둘기도 열심히 아스팔트를 쪼아대고 있다 간간히 참새들도 틈을 놓치지 않는다
갑자기 혜화역 2번 출구가 짹짹거린다 안산에서 단체로 왔다는 사백 명의 중학교 일 학년 학생들과 인솔교사들이 시끄럽다 비둘기들이 움직일 때마다 여학생들의 비명소리가 날아오른다 시크릿 공연을 단체로 함께 보러 왔다는 건강하고 예쁜 아이들을 보니 나는 도저히 웃을 수 없다 길 건너편 은행나무 가로수 사이로 보이는 서울대학병원 담장 가득 눈물이 얼룩진다
1990년 여름 나는 극적으로
저 서울대학병원 흉부외과 중환자실에서 부활할 수 있었다
내가 두두에 다시 다녀오는 동안 안산에서 온 중학생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학로에서 사주를 보고 있는 아저씨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이번에는 남양주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왔다는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안산 중학생들과 달리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학생들이었다
내 옆에 앉은 여학생이 설문지를 들여다보며 한숨을 크게 쉬고 있었다
알고 보니 설문을 조사하기 위해
남양주에서 대학로까지 대학생들을 찾아 원정을 나온 것이었다
그 여학생을 보자 나의 성북 학생회 시절이 떠올랐다
성북 학생회는 고학생들이 학비를 벌기 위해
합숙 생활을 하며 철 지난 주간지 잡지책을 팔아 돈을 버는 단체였다
어떻게 보면 정상적인 경제활동이 아니라 앵벌이 단체였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그렇게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하여 학비를 벌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나는 이미 대학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학생의 마음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단 한 장의 설문지도 받아내지 못하고 발을 동동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잡지책 한 권도 팔지 못하고 밤하늘 별들을 바라보고 한숨짓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자처해서 설문지를 작성해 주었다
졸업 후 가장 고민거리를 묻는 설문에서 나는 망설임 없이
"취업"이라고 체크했다
나는 잠시 시인이 아니라 대학생이 된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귀여운 여학생에게
설문지를 잘 받을 수 있는 요령을 가르쳐 주었다
성북 학생회 시절에 배운 노하우를 전수해 주었다
그렇게 한 장의 설문지 받는 일에 성공한 그 여학생은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용기를 얻은 여학생은
조금 전의 난감한 표정에서 완전히 벗어나
적극적으로 설문지를 받기 시작했고
심지어 다른 친구들도 그 여학생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서울대학병원 후문에는 오늘도 여전히
환자들의 쾌유를 빌며 목탁을 두드리는 스님이 계셨다
내가 1990년 6월에 부활한 서울대학 병원에 갔다
오늘은 환자가 아니라
추억을 찾아서 왔다
나무들이 참 많이 자라 있었다
병원에는 여전히 아픈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알리지도 않았었는데
오규원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알고
이 못난 제자를 찾아오셨을까
그리고 그때
오규원 교수님과 함께 나를 찾아왔던 후배는 누구였을까
꽃다발을 전해주고 갔던 그때 그 후배 이름이라도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늘도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린다
길 하나 사이에 두고
서울대학병원과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이 있다
삶과 죽음이 그렇게 있다
오늘도 많은 연극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많은 예술가들이 혼을 불사르고 있다
낙타의 등을 닮았다는 낙산에 올라갔다
낙산 정에서
귀엽게 사랑을 속삭이는 어린 학생들이 있다
서로의 머리에 꽃을 꽂아주며
서로의 귀에 꽃을 꽂아주고
착 달라붙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으며 웃는 모습이 참 예쁘다
나는 왜 저만한 나이에
사랑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었을까
두두에서 드디어 만난 구본갑 선배님이 나는 참 좋다
그분의 순수한 열정과 사랑이
나는 참으로 존경스럽다
구본갑 선배님은 내가 아는 어떤 분 보다도 아름다운 분이시다
그리고 나는 너무나 좋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참으로 행복한 만남이었다
너무 늦게 만난 분들이지만
앞으로 남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내가 존경하는 또 다른 두 분
김종순 회장님과
이능표 선배님이
부부라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다
이능표 선배님 댁에서 만난 타자기가 너무 반가웠다
나도 아마 타자기가 없었더라면
너무 악필인 나는 어쩌면
아직도 등단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 방에도 내가 처음 샀던 마라톤 타자기가 있다
나는 사실
이능표 선배님과
이창기 선배님의
문예중앙 시를 보고
서울예대의 존재를 알았고
서울예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능표 선배님과
이창기 선배님은
내 문학의 등대 이셨다
아침 일찍 일어나
회장님께서 손수 끓여주신 떡국을 먹고 나왔다
2층에서 주무시고 계신 분들은 카메라에 담아 오는 것으로
아침 인사를 대신했는데, 허락 없이 공개할 수 없어
나 혼자만 소중하게 간직하기로 했다
용산과 서울역과 남대문과 남대문 시장과 명동은 오늘도 여전히 잘 있었다
내가 하숙했던 남산동 그 낡은 집은 헐리고 말았다
그 자리에 큰 건물이 들어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퍼시픽호텔 맞은편에
공사용 벽이 세워져 있었다
그 좁고 낡은 집에서 나는 1학년을 보냈다
그리고 2학년 때는 백마역 부근에서 자취를 했다
푸르른 날에
공연 마지막 날이었다
강의실은 레스토랑이 되어 있었고
도서관과 매점은 없어져 버렸다
교실이 좁아서 야외수업을 자주 하던 남산으로 갔다
그때의 그 목소리들이 다시 들리는 듯했다
특히 나는 학교 때나 지금이나
와룡정이 좋다
와룡묘가 좋다
오늘은 안에 들어가 참배까지 하고 나왔다
특히 나는 입구의 계단이 좋다
오늘은 공사 중이었다
공사 중 이어도 나는 좋다
나는 이 계단에
특히 자주 와서
혼자 놀았었다
심장병 환자였던 내가,
내가 계단을 가장 무서워하던 시절에도
나는 이 계단만은 자주 왔었다
어쩌면 조금 불편한 것들이
나는 오히려 아름답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나의 길도
이 계단과 같을 것이다
오늘 자세히 읽으니
와룡묘라고 적혀 있다
나는 와룡정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와룡정이면 어떻고
와룡묘이면 어떠랴
어차피 같은 말 아니더냐
오늘따라 유난히
콧구멍이 크게 보인다
야, 이놈아
인상 좀 펴고 살아라 이놈아
남산 순환로에 꽃도 많고 사람들도 많다
나는 밤마다
이 남산 순환로를 따라
남산타워까지
홀로 걸어서
올라 다녔다
남산동에 살았던 나는
순전히 혼자일 수밖에 없었다
날마다 홀로 쓰러져야만 했던 나는
나의 심장병을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나는 참 독한 놈이었다
선천성 심장병 환자였던 나는
가족들에게 들킬까 봐
중학교만 졸업하고
서울까지 멀리 가출을 하였고
서울로의 고등학교 진학은
순전히
합법적인 가출이었다
나는 내가 아파 쓰러지는 것보다
나의 병이 들통나
부모님들이 걱정하는 것이
더욱 두려웠던 것이다
우리 집안 형편에
도저히 심장병 수술은 엄두를 못 내는 것이었고
아픈 자식을 수술시키지 못하는 부모님의
안타까워하시는 모습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순환로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때는 주로 밤에 남산을 올랐다
지금은 길이 더 좋아져 있다
올라다니는 사람들도 더 많아졌다
우리들의 서울은 오늘도 안녕하다
그런데 정말로 안녕한 것일까?
정말로 안녕하면 좋겠다
와, 이제는 전기버스도 보인다
서울투어 버스도 보인다
장미와 카네이션이 나란히 있다
참 아름답다
꽃도 예쁘고 사람들도 참 예쁘다
그런데 서둘러 내려가지 않으면
이나미 선배님과의 약속 시간에 늦겠다
남산타워는 오늘도 여전히 잘 발기되어 있다
하늘과 땅은 오늘도 이렇게
사랑을 나누고 있다
정자에도 역시 사람들이 많다
나뭇가지가 때로는 거웃처럼 보인다
벌써 단풍이 든 반역자들도 보인다
남산 한옥마을 쪽으로 내려와
충무로에서 지하철을 타니
안국동이 참 가깝다
너무 일찍 도착하여 인사동 거리에서 사람들을 구경한다
그리고 이나미 선배님께서 사주신 청국장이 참 좋았다
러시아까지 다녀오셨다는 이나미 선배님
조교이셨던 선배님을 만나 참 행복했다
그런데
선배님의 이야기는 듣지 않고
내 말만 한 것 같아서 많이 쑥스럽다
나는 왜 그렇게 많은 말을 하였을까
참으로 말을 할 줄 모르는 내가 왜, 어째서.....,
시인의 월급은 얼마나 된다냐 / 배진성
― 어머니, 시인의 월급은 가난입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길을 간다
두엄자리 곁에 세워진 아버지의
낡은 지게를 지고 저물녘을 간다
참깨 베러 가신 어머니의 산밭으로
늦은 마중을 간다 오랜만에
바람을 비껴 여름 한쪽 끝으로
산길을 오른다
노을이 차마 곱게 익는다
일찍부터 외항선을 탄 만수
뱃사람이 된 만수네가 새로 장만한
논을 바라보며 들길을 간다
일곱 번씩이나 떨어지고도 다시
행정고시공부를 시작했다는 현길이,
이미 기울어 버린 그 집에서
마지막으로 팔아넘긴 논배미를 지나
쓸쓸하게 걸어간다 새를 쫓는 깡통소리와
반짝이는 반짝이의 마음들이 노을 속으로
새를 날려 보내며 또 내일을 염려하는 가슴을
가다듬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허수아비는
쓰러지지 않고 동그랗게 질린 비닐 얼굴들이
하늘까지 닿으려는 마음으로 솟아오르곤 했다
콩밭으로 바람이 기어들어가고 밤은
들쥐처럼 숨어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어머니와 산길을 내려온다 가끔
고개 치켜드는 벼 포기 사이로 추억들이
발소리를 숨죽이며 기어 나왔다 나는 참깨를 지고
어머니는 토란대를 이고 오셨다 가슴 조인
달빛이 풀어지고 우리는 하염없이 걸어 내려온다
― 어머니, 저 이제 시인이 되었어요
― 그래, 시인이 뭣 허는 것이다냐
― 예, 지금까지 제가 되고 싶었던 것이에요
밤낮을 밤으로만 지내면서 말이에요
― 그러냐, 그럼 이제 취직이 됐단 말이냐
―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 것이 아니에요
― 그럼, 시인이 뭣한 것인지 그러냐
오랜만에 네가 웃기까지 하고 말이여
― 예, 앞으로
우리들의 고향을 노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노래? 그럼 인쟈 테레비에도 나온다냐
―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 게 아니에요
― 그라믄, 시인 한 달 월급이 월마나 된다냐
먹고살 만한 직업이다냐
요즘 시상에는 돈이 최고더라
봐라, 만수는 돈 있승께 다들 걱정허는
장개도 쉽게 간다드라
돈 많은 이쁜 색씨가 낼 모래 온다드라
― 어머니, 하지만 저는 그렇지를 못해요
앞으로 어머니를 팔지도 몰라요
앞으로 고향을 팔아먹을지도 몰라요
시인은 가난한 직업이거든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잖아요
마음을 갈고닦아 영혼을 맑게 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저는 더욱 시인이 되고 싶었어요
우리들의 이야기가 들판 가득 출렁일 때 달빛은 우리가 걸어온 들길을 따라오고 있었다 어머니, 저는 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어머니와 고향을 위하여 우리들의 생활을 팔아먹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땅의 눈물 같은 시 한 편으로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