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나를 보낸다 52
제주도의 농경신 자청비는 하늘나라에서
씨앗을 받아와서는 제주도 곳곳에 심었다
쌀 ·보리 ·조 ·콩 ·기장 등 5곡은 가져왔는데
제주도 땅에 딱 맞는 메밀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하늘나라로 올라가서 가져왔다
뒤늦게 파종한 메밀을 부지런히 자라게 했다
그리하여 메밀은 늦게 심고 빨리 수확을 한다
제주도 메밀꽃밭은 하얀 백비로 누워 있는데
달빛은 밤마다 붉은 피로 비문을 쓰기도 한다
언뜻 보기에는 평화가 하얀색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메밀처럼 온몸에 피가 묻어있다
제주도에서는 메밀을 1년에 두 번 수확한다. 보통 4월에 뿌려 6월에 걷고, 8월에 뿌려 11월에 걷는다. 제주도에서 메밀꽃이 절정을 맞이하는 때는 5월 말과 10월 초라고 할 수 있다. 이 무렵 제주도 중산간에서는 흔히 메밀꽃들이 흐드러진 메밀꽃밭을 볼 수 있다. 나는 그동안 메밀꽃만 보고 메밀은 자세히 보지 못했다. 내가 좋아하는 빙떡을 먹으면서도 제주도의 메밀에 대하여는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우연한 기회에 산록도로를 가다가 넓은 메밀밭과 함께 있는 제주메밀식당과 제주메밀카페를 만나서 들어갔다. 제주메밀체험관도 함께 있다고 하였다. 점심을 한참 동안 기다린 후에 제주메밀비비작작으로 먹고 메밀가루도 한 봉지 샀다. 기다리는 동안 넓은 메밀밭에 만들어놓은 산책길을 걷고 포토존에서 사진도 찍으며 재미있게 놀았다. 메밀꽃은 멀리서 보면 소금처럼 혹은 눈송이처럼 희게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그냥 흰색만은 아니다. 심지어 온몸이 붉은 메밀꽃도 있었다. 사람들도 그렇듯이 가까이서 자세히 보아야 제대로 알 수 있다.
일곱 걸음 간격으로 나란히 서 있는 그 식당과 카페는 광평리의 마을기업이라고 하였다. 제주도에는 그런 마을 기업들이 많다. 가까운 서광리에도 그런 마을기업인 식당과 카페가 나란히 있다. 서광리에는 서광 곶자왈에서 마을 사람들이 따서 만든 산동 열매를 활용한 음식들이 유명한데 이곳 광평리에는 메밀을 특화한 식당과 카페였다. 특히 광평에는 넓은 메밀밭이 함께 있어서 더욱 좋았다. 그리고 무료로 나누어주는 <제주에서 만난 메밀의 맛 20, 제주메밀 레시피북>은 나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때문일까, '봉평메밀국수' 때문일까. 사람들은 메밀 하면 강원도를 흔히 떠올린다. 하지만 우리나라 메밀 최대 생산지는 제주도라고 한다. 제주도의 메밀 재배 면적은 전국의 43%를 차지하며, 해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때로는 거의 절반에 가까운 메밀이 제주도에서 생산된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봉평에서 유통되는 메밀은 제주에서 생산된 상당수가 강원도로 건너가서 가공된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좀 더 알아보니 그동안 제주에는 메밀 가공 공장이 없어서 생산량 대부분을 강원도 등 외지로 보내왔다고 한다. 제주도에 메밀 가공 공장이 생긴 것은 최근의 일이라고 한다.
메밀은 제주도의 신화에도 등장하는 곡식이다. 제주의 농경신 자청비는 하늘나라에서 씨앗을 받아왔다. 쌀과 보리와 조와 콩과 기장을 받아와서 심었는데 메밀이 빠져 있었다. 그래서 자청비는 하늘나라에 다시 올라가서 메밀 씨앗을 되찾아왔다. 다른 작물보다 늦게 파종하지만 다른 작물과 함께 수확하는 메밀의 특징을 묘사한 이 이야기는 자청비 신화 '세경본풀이'의 대미를 장식한다. 또한 농경신 자청비는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먼저 자란 곡식이 다 떨어져 먹을 것이 없게 되면 배가 고프니 그때 메밀밭에 가서 환하게 핀 하얀 꽃(메밀꽃)을 보면 배고플 일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
제주도는 이제 나에게 메밀의 고향으로 기억될 것 같다. 쌀이 귀했던 제주도에서 제주도 사람들이 메밀로 만들어 먹은 빙떡과 돌레떡, 꿩메밀칼국수와 메밀묵, 그리고 메밀가루를 덧보태는 몸국과 고사리육개장 등 여러 향토요리가 메밀의 고향임을 반증하고 있다. 메밀가루와 메밀쌀로 만들 수 있는 메밀음식 20가지를 알려주는 이 작은 책이 참 좋다. 제주 사람들과 생사고락을 나누며, 그들의 삶과 지혜를 품어 온 제주메밀 이야기가 참 좋다. 전통요리부터 퓨전요리까지 어떠한 요리 장르도 찰떡같이 소화해 내는 제주메밀과 함께 풍성하고 질박한 제주의 맛과 멋을 경험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메밀 줄기의 높이는 보통 60∼90cm 정도 된다고 한다. 줄기 속은 비어 있다고 한다. 뿌리는 천근성이나 원뿌리는 보통 90∼120cm에 달하여 가뭄에 강하다고 한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이는 부분보다 보이지 않는 땅 속의 뿌리가 더 깊이 뻗어 있다는 말이다. 생명력이 강한 제주도 사람들을 참 많이도 닮아 있다.
옛 선조들은 메밀을 ‘오방지영물(五方之靈物)’이라 부르며 신성하게 여겼다. 푸른 잎, 붉은 줄기, 흰 꽃, 검은 열매, 노란 뿌리 등 오색을 갖춘 신비한 영물이라는 것이다. 선조들의 표현처럼 메밀은 버릴 게 하나도 없다. 주로 열매를 먹지만 열매뿐 아니라 식물체의 모든 부분에 좋은 성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잎은 차나 채소로, 꽃은 밀원으로, 열매의 껍질은 베갯속으로 쓰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메밀에 들어 있는 대표적인 좋은 성분은 항산화물질인 ‘루틴’이다. 메밀에서 처음 확인된 루틴은 비타민 P의 일종으로, 모세혈관 벽을 튼튼하게 하고 혈관의 투과성을 조절해 준다. 고혈압·고지혈증·동맥경화·당뇨·암 등 성인병의 예방과 치료에 효과적이며, 신부전증 등 신장 관련 질환 개선에도 도움이 된다. 실제로 고혈압 환자 60명에게 6주간 메밀 추출액을 섭취하게 했더니 혈압과 혈당이 떨어졌다는 국내 연구결과가 있다.
나는 메밀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제주메밀을 되살리기 위하여 제주메밀육성사업단, 제주메밀영농조합법인, 한라산아래첫마을영농조합법인이 앞장서고 있는 듯하다. 제주도의 중산간은 대부분 골프장이 들어서 있다. 큰 자본을 앞세우고 들어와 한라산을 유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중산간 마을에는 이제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떠나고 노인들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농업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농업으로 살아남으려는 그들의 노력이 참으로 아름답다. 우리들을 먹여 살리는 농업과 임업은 그 무엇보다도 아름답다. 줄기보다 뿌리가 더 깊고 멀리 뻗어있다는 메밀, 그런 메밀보다 더욱 강인한 제주 사람들이 있어서 나는 그래도 안심이 된다.
제주도는 우리나라에서 메밀 생산량으로도 1위이고 메밀 생산면적으로 1위를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메밀사업을 활성화하지 못했다. 척박한 제주 토양의 대표 구황작물로서 제주인의 삶과 더불어 신화적, 역사적, 생활적 유례를 갖고 있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제주메밀을 소개하기 위해 2015년 제주메밀 발전 5개년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이후 제주메밀육성사업단은 성산읍 난산리에 메밀 수확 및 원물 가공 공장, 안덕면 광평리에 메밀 제품 생산 공장을 설립했다. 난산리 공장은 '제주메밀영농조합'이, 광평리 공장은 '한라산아래첫마을'이 운영한다. 광평리에 개관한 '제주메밀체험관'에서는 빙떡과 같은 향토음식 외에 메밀가루를 이용한 베이킹 등 직접 만들고 맛볼 수 있다. 두 곳 업체가 수확과 생산을 마치면, 제주메밀육성사업단이 다른 지역 음식 박람회 등에 참가해서 적극적으로 알리고 관련 워크숍과 강의를 갖는다고 한다.
우리들의 농업을 살리려는 제주도 당국과 늙어가는 고향 마을을 살리려는 마을 주민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참으로 아름답다. 이번에 내가 방문한 제주메밀식당과 제주메밀카페는 '한라산아래첫마을'영농조합에서 운영하는 곳이었다. 산록도로를 지척에 둔 광평리는 해발 500 ~ 600m 지점에 자리한 중산간 마을이다. 봄과 가을, 메밀꽃이 만개하는 시기에는 광활한 평지라는 동네 이름에 걸맞게 너른 들판 가득 메밀꽃으로 뒤덮인다. 2015년 5월 마을 만들기 사업을 시행하면서 영농조합법인을 만들고, 광평리 마을 주민 12명을 조합원으로 하는 '한라산아래첫마을'이 문을 열었다. 현재 메밀 생산 시설인 석발기, 선별기, 클리너, 탈피기, 제분기 등 다섯 가지 설비를 갖추고 하루 최대 500kg의 메밀을 생산한다. 광평리는 메밀 마을 공동체를 꿈꾸며 '제주메밀체험관'을 개관했다. 메밀 생산 공정 체험은 물론이고 음식 체험 등 제주메밀에 관한 풍성한 프로그램을 더불어 진행하고 있다.
제주 메밀을 다시 본다. 큰 하트 모양의 푸른 잎이 하늘을 떠받들고 있다. 그 위에 흰 꽃들이 소곤소곤 귓속말을 하고 있다. 흰 옷에는 아직도 붉은 피가 묻어 있다. 흰 옷을 들춰보면 붉은 줄기가 뼈처럼 있다. 곧 검은 열매가 열릴 것을 나는 믿는다. 하트 모양의 작은 열매들이 열릴 것을 나는 믿는다. 대동맥 판막처럼 세 장의 하트가 모여 삼각뿔의 검은 하트를 만들 것을 나는 믿는다. 그 검은 열매의 겉껍질을 벗기면 그 안에 하얀 메밀쌀이 들어있을 것이다. 저승사자의 검은 옷을 벗으면 메밀꽃처럼 하얀 메밀의 마음이 드러날 것이다. 그런 하얀 마음으로 만든 메밀을 먹는다. 새하얀 빙떡을 먹고 제주메밀 비비작작면을 먹는다. 바로 곁에 무섭게 들어선 골프장에서 날아온 골프공도 메밀밭으로 사라지고 골프장 잔디밭에도 메밀꽃들이 하얗게 다시 피어날 것만 같다. 한라산아래 첫 동네 사람들처럼 종석산의 사람들이 메밀꽃처럼 아른거리고 산삼꽃과 산약초꽃들이 환하게 어우러지고 있는 모습을 황영처럼 본다. 열매가 다시 의미 있는 씨앗이 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야만 할까를 다시 한번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