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나를 보낸다 51
나는 30년 넘게 유배생활을 하였다. 제주도보다 더 먼 이어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나는 그동안 스스로 유배자가 되었다. 내가 지은 죄가 있어서 스스로에게 벌을 주었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바다만 바라보며 살았다. 30년 넘게 꿈만 꾸며 살았다. 하늘만 보며 살았다. 위리안치 속에서도 아름다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보았던 이어도가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유배생활을 마치고 세상 속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꿈속에서 보았던 이어도 생활을 계속하고 싶었다. 꿈속에서 보았던 이어도를 세상으로 옮겨놓고 싶었다. 이제 나는 유배생활을 마치고 세상 속으로 돌아와 천천히 걸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먼 바다를 건너가고 있다. 이어도종합해양과학기지를 지나가고 있다. 마라도를 지나가고 있다. 가파도를 지나가고 있다. 나는 이제 막 송악산에 도착했다. 산방산이 아름다워 보였다. 산방산 쪽으로 간다. 사계해안도로가 아름답다. 바다에 떠 있는 형제섬도 좋다. 수반 위에 올려진 수석을 닮았다. 산방산에 올라가 산방굴사에서 보니 저 멀리 이어도가 보인다. 산방산 정상에 올라 좌정하니 고향이 보인다. 월라봉쪽으로 떠오르는 달빛이 참으로 아름답다. 지리산과 설악산을 넘어, 백두산을 넘어 몽고를 넘어 인도로 가는 순례길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산방산과 월라봉 사이 화순에서 좀 쉬어가기로 한다. 꿈속에서 보았던 이어도를 옮겨놓기 시작한다. 꿈속에서 보았던 이어도를 현실로 옮겨놓으니 이어도공화국이 만들어지고 있다. 나는 내가 옮기고 내가 만들고 있는 이어도공화국에서 한동안 머물기로 한다.
이어도공화국에서 보니 제주도에 아름다운 사람들이 참 많이 보인다. 아름다운 시인들도 많고 아름다운 작가들도 참 많다. 아름다운 예술가들도 많고 아름다운 농부들도 많고 가슴이 따뜻하고 요망진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꿈속을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해서 그 아름다운 사람들과 같은 길을 동행하지는 못하고 있다. 언젠가는 나도 그 아름다운 사람들과 같은 마음으로 어깨동무하며 동행할 수 있을 것을 믿는다. 아직은 나의 유배생활 또한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어서 조심조심 홀로 순례를 시작한다.
제주작가 68호(봄호)
깊은 밤 산책을 나간다
개 짖는 소리 멀어지고
지상의 불빛 모두 사라진다
계곡 물소리가 나를 감싼다
물소리를 짚고 가는 지팡이 소리에
하늘에는 젖은 별빛들이 피어나고
월라봉에서는 노루가 노루를 부른다
유반석에서 부엉이 소리가 들려오고
달도 보이지 않는데 박수기정에서
항아가 내려와 샘물 마시는 소리 들린다
‘김광종영세불망비’ 앞에 앉아서 나는
도깨비들의 춤을 보며 물소리를 받아 적는다
휴대폰 메모장에 물소리와 별빛을 받아 적고
다시 하늘을 보니
그 많았던 별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다
나는 다시 별빛을 찾아서 계곡으로 돌아가는데
별들은 보이지 않고 동백꽃들만 길가에 내려앉아
깊고도 푸른 물소리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있다
칼바람 추위에 납작 엎드려 있던 쪽파들이
팔을 쭉쭉 뻗어 기지개를 켠다
눈송이인지 수선화 꽃잎인지 매화 꽃잎인지
새하얀 것들이
입춘 하늘을 온통 흔들어대고 있다
탐라국(耽羅國) 신들이 까마귀 궉새들 앞세우고
한라산 구상나무 숲으로 내려온다
동자복 미륵과 서자복 미륵이
용두암에서 헛기침을 크게 한다
신구간(新舊間)에 하늘 다녀온 탐라국 신들이
관덕정(觀德亭) 앞으로 내려온다
일만 팔천 신들이 시내까지 내려와 둘러보고 있다
제주목관아지(濟州牧官衙址)로 속속 모여들고 있다
신들과 사람들이 깃발 앞세우고 관덕정으로 몰려오고 있다
자청비가 앞에서 낭쉐를 끌고 온다
새로운 씨앗 뿌리려고 새 씨앗 가지고 자청비가 온다
바람신(風神) 영등할망도 함께 온다
어지러운 세상 한 번 뒤엎으려고 서둘러서 온다
바다도 뒤집고 하늘도 뒤집어 세상 한 번 바꾸려고 온다
천지왕 허락 받아 작심하고 불어온다
바다에도 뿌리고 땅에도 뿌리고 하늘에도 뿌리고
온 세상에 알토란같은 씨를 뿌리려고 풍요신이 온다
천지왕의 두 아들 대별왕과 소별왕이 함께 온다
해도 둘 달도 둘 혼돈의 세상
거대한 활로 하나씩 쏘아 없애고 송피가루 뿌려
천지 질서를 바로 잡았던 두 신이
큰 활 둘러메고 보무도 당당하게 씩씩하게 온다
자청비를 따라 문도령도 오고 정이 없는 정수남이도 온다
풍물패와 난장패와 걸궁패와 함께
세경신 세 명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탐라국을 손수 만든 설문대할망이 온다
옥황상제의 호기심 많은 셋째 딸이 온다
자식들 모두 불러 모아 오백장군들과 함께 온다
깃발에 쓰인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 선명하다
흔들릴 때마다 부자천하지대본(富者天下之大本)으로 펄럭인다
흔들릴 때마다 권력자천하지대본(權力者天下之大本)처럼 펄럭인다
북치고 꽹과리치고 나팔까지 불어대며 춤추며 몰려온다
신은 사람 같고 사람은 신 같이 파도치며 몰려온다
등불처럼 몰려온다 등대불처럼 몰려온다
환하게 불 밝히며 불빛처럼 몰려온다
신명나는 굿판에서 낭쉐 한 마리
백비 속으로 걸어서 들어간다
남원읍 의귀리 송령이골 지나 백비 속으로 들어간다
그 어둠 속에서 연못을 파기 시작한다
연꽃을 피우기 위해 뼈를 뽑아 뼈를 깎아
뼈의 송곳으로 연못을 파기 시작한다
뼈의 칼로 비문을 새기 듯
깊은 어둠 속에 연못을 파기 시작한다
관덕정(觀德亭) 앞 십자가에 매달려 지금껏 지켜보던 이덕구
신들을 따라 제주목관아지로 들어가지 않는다
사람들을 따라 탐라국 왕궁으로 입궐하지 않는다
주머니에 꽂혀있던 빛나는 숟가락 던져 버리고
『한라산』시집 한 권 펼쳐 들고 강정으로 달려간다
온통 하늘을 뒤흔들던 꽃잎들
백록담의 백록이 뛰어 오르고 오름마다 꽃들이 피어난다
제주작가 69호(여름호)
심우도(尋牛圖) 속으로 걸어간다 나의 흰 소는 보이지 않고 검은 소들이 있다
소들이 소나무 아래 모여있다 멍에도 코뚜레도 없다 숲에서 뜯어먹은 풀을 되새김질 하며 서로의 눈빛을 본다 서로의 등을 핥아주는 소도 있고 죽비처럼 꼬리로 엉덩이를 치는 소도 있다 새로 발견한 풀밭을 알려주는지 귓속말을 속삭이는 소도 있고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는 소도 있다
나도 소를 길렀다 나는 늘 길을 들이려고 했다 내가 기르는 소는 코뚜레를 하였고 멍에를 하고 쟁기질을 해야 했다 갱본에서 쉬는 동안에도 말뚝에 박혀 있어야 했다 나의 소는 소나무 그늘에서 쉬어보지 못했다
나는 흰 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 생각만 하였다 소와 함께 놀아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내가 소를 업어 줄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소들이 다시 숲으로 들어간다 소는 걸어가면서도 텅텅텅 똥을 잘 싼다 풀을 먹고 자란 소들이 풀에게 밥을 준다 나도 소나무 그늘에 앉아 바다를 보다가 소들이 들어간 숲으로 따라 들어간다
숲에서 비명소리가 들린다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가 귀를 찢는다 소나무가 없어져야 땅값이 오른다며 소나무를 죽이고 있다 그해 겨울의 숲처럼 숲은 온통 소나무 무덤이 된다
숲에 소나무가 없다 소들이 함께 모여서 쉴 곳이 없다 가시덤불 속에서 가시에 찔리며 소들이 서 있다
소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어렵게 새로 돋아나는 소나무 새싹에 콧김을 불어넣는다
나는 심우도(尋牛圖) 밖으로 나와 심우도(心牛圖)를 그린다
심재산방에서 보니
나와 식물이 하나로 보인다
마음을 굶겨보니
몸의 속까지 다 보인다
나무의 뿌리는 땅 속에 있고
사람의 뿌리는 가슴 속에 있다
나무의 뿌리는 머리카락처럼 무성하고
사람의 뿌리는 알뿌리처럼 둥그렇다
알뿌리 같은 심장이 땅에 묻혀도
나의 가슴에는 피가 잘 돌아
나의 생각은 나무처럼 무성하게 잘 자랄 것만 같다
너덜너덜한 대동맥판막, 망가진 심장도
땅 속에서는 뿌리를 잘 내릴 것만 같다
좌망정에 앉으니
계곡에 숨겨놓은 배도 보이고
늪에 감추어둔 그물도 보인다
월라봉에서 날아오는 학의 긴 다리도 보이고
바다로 날아가는 오리의 짧은 다리도 보인다
산방산에 눌러앉은 구름도 보이고
강정으로 실려 가는 마징가 같은 케이슨도 보인다
심재산방 좌망정에 앉아 눈을 감으니
나무 기둥을 타고 올라가는
천 년의 강물에 빈 배 하나
하늘을 향해 가고 있다
빈 배 가득 하늘이 실려 간다
제주작가 70호(가을호)
한라산 어욱은 새가 되지 못하여
봄부터 베를 짜기 시작한다
초가지붕에도 오르지 못하여
베옷 한 벌 장만하기 시작한다
천둥 번개 요란한 여름에도
베틀소리 멈추지 않는다
새 옷 한 벌 얻어 입지 못하고
만가(輓歌)도 없이 숨 죽여 가신 님들
해 좋은 날, 어욱꽃 마을까지 내려온다
수의 한 벌 챙겨들고
요령소리 앞세우고
잃어버린 마을까지 잊지 않고 찾아온다
무너진 돌담 하나 대답이 없어
빈 상여 소리에
빈 수의 한 벌 흩어져 날아가고
갈 곳 잃은 바람의 곡비
온몸이 휘청거린다
뼈만 남은 한라산 억새
흰 눈 내려 헛묘에 묻히고
한라산 자락에는 해마다
메김소리 가득한 오름 하나씩 늘어난다
* 어욱 : 억새의 제주도 말
* 새 : 제주에서는 볏짚 대신 새로 초가지붕을 만들었다
종석산에서 정읍사(井邑詞)
노래소리 들린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종석산 정읍사(井邑寺)에서
범종소리 들린다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
모든 것이 선(禪) 아닌 것이 없다
내 가슴 속으로 들려오는
달빛 종소리, 요것은 도대체 뭣이다냐
옥정호에서 올라오는 물안개 발자국소리다냐
참나무 숲으로 숨어드는 밤의 숨소리다냐
참나무 그늘을 덮고 잠든 산삼들의 잠꼬대다냐
홀로 달아오른 산삼 열매들의 후끈거림이다냐
아. 나는 너무 오래도록 떠돌았던 장돌뱅이였구나
아, 나는 너무 오래도록 보지 못한 청맹과니였구나
제주공항에서 여수공항은 바로 코 앞 이었구나
이륙하고 추자도가 보이더니 바로 착륙이구나
여수에 도착한 나비는 연어의 종착역을 지나
옥정호가 있는 숲으로 날아가는 구나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아, 참으로 먼 세월이 한 순간이구나
종석산에서는 정읍사(井邑詞) 후렴소리 들리고
종석산 정읍사(井邑寺)에서는 운판소리 들려오는데
나의 지친 가슴 속에서 환하게,
꿈꾸던 숲에서 드디어 산삼 꽃이 함께 영그는구나
제주작가 71호(겨울호)
달은 문이다 문은 열리고 달은 하늘에 이르는 길이다 달은 달(達)이고 문은 문(文)이다
가슴을 열고 반월문을 바꾸니 달문 열리는 소리 들린다 가슴에 묻은 사람들 숨소리 들린다
달이 자꾸만 문을 기웃거린다 나는 아직 안토니오 가우디를 모른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도 모른다 달빛으로 백 년의 꿈을 심는다
동쪽에는 평화공원이 있고 서쪽에는 평화학교가 있다 생명학교와 함께 있다 그 평생학교에서 가파도와 마라도가 보인다 가끔은 저 멀리 이어도와 서천꽃밭이 보인다
평생 베옷을 만드는 갈대와 억새가 있다 평생 곡비 노릇을 하는 새들이 있다 백 년을 날려 보내고 백 년을 울어야 비로소 하늘문에 닿을 수 있을까
수의 한 벌 얻어 입지 못하고 떠난 영혼들을 위하여 낮에는 꽃들이 촛불을 켜고 밤에는 별들이 촛불을 켠다 달은 밤새 메밀밭 백비에 비명을 썼다가 지운다 파도는 밤낮으로 절벽에 비명을 썼다가 지운다 그렇게 백 년을 써야만 주춧돌 하나 온전히 세울 수 있을까
폭낭과 워싱턴야자수가 나란히 서 있다 야자수 쪽에서 해가 떠오른다 키 큰 야자수 그림자가 폭낭 가슴을 관통한다 폭낭 쪽으로 해가 기울어진다 넓은 폭낭 그림자가 홀쭉한 야자수를 안아준다
백 년의 꿈이 낳은 폭낭 가지에 달문이 열린다 초승달 살이 환하게 오르고 있다
* 폭낭 : 팽나무를 제주도 사람들은 폭낭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다
# 큰넓궤
평화로 가는 길에 붉은 상사화
무리지어 피어난다
추석날 오후 큰넓궤 찾아간다
큰넓궤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 해 추석을 어떻게 지냈을까
아, 큰넓궤는
끝까지 눈을 감지 못한 어머니의 눈동자
길에서 나를 쏟아버린 어머니의 자궁
서늘한 바람이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
싸늘한 정신이 가슴 속을 후벼판다
볼레오름까지 올라갔던 사람들
그들을 두 달 동안 지켜주었던
입구의 종나무
그 종나무와 어울려 살고 있는
단풍나무를 본다
홍단풍은 봄부터 붉고
청단풍은 가을에도 푸르다
아, 입구가 너무 좁다
거꾸로 찍혀있는 발자국처럼 거꾸로 들어간다
흙이 되어버린
어머니의 눈동자 속으로, 자궁 속으로
기어서 들어간다
멀리서 나팔소리 들려오고
어머니의 심장소리 들린다
어둠이 양수처럼 나를 감싼다 이 곳에서
붉은 상사화 지는 것도 잊은 채
두어 달 어머니와 함께 종나무로 살다가 나는,
# 발자국 밥그릇
눈이 온다 하늘이 온다
하늘의 식구였던 눈이 온다
하늘의 식구였던 하늘이 온다
눈이 쌓인다
하늘이 내려 쌓인다
큰일이다 큰일났다
발자국이 지워지지 않는다
오려거든
더 빨리 펑펑 쏟아 부어라
우리들이 벗어놓은
발자국 가득 쌓여 넘쳐버려라
거꾸로 벗어놓은 발자국이
차라리 하늘이 되어버려라
큰넓궤에서부터 따라오는 발자국이
자꾸만 우리들의 목숨을 따라오고 있다
왕오름을 지나고
이스렁오름을 지나고
어스렁오름을 지나고
산짐승도 내려가 텅 빈 볼레오름에 다 오도록
우리들의 발자국은 하늘이 되지 못하는구나
고봉밥이 되지 못하는구나
발자국 밥그릇에 하늘을 다 담지 못하는구나
아, 존자암의 염불소리도
부처님께 올리는 삼시 세 때 공양도
우리들의 발자국 그릇을 다 채워주지는 못하는구나
하늘의 눈꽃만 지상에 피어나
참나무들의 겨우살이 열매 눈빛이 더욱 붉어지더니
덜 채워진 하늘이 결국 붉게 엎어지고 마는구나
# 헛묘
정방폭포로 간다 정방폭포 앞바다로 간다 태평양으로 간다 혹시, 아는 사람이 뼈 한 조각이라도 가져왔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고향으로 간다 동광리로 간다 무등이왓으로 간다 삼밭구석으로 간다 혹시, 살 한 점이라도 붙어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또 다시 낭떠러지 위로 간다 절벽의 바위를 뒤진다 폭포 아래 바위를 뒤지고 물속을 뒤지고 바다 속을 뒤지고 바다 속 물고기들을 뒤지고 물고기 뱃속을 뒤진다 혹시, 숨결 하나라도 만날 수 있을까 싶어서 허공 속을 뒤진다 더 높은 하늘을 뒤진다 구름 속을 뒤진다 빗방을 속을 뒤진다
뒤지다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이 지상을 떠난 뒤에도, 집 앞으로 몰려든다 죽어서도 몸을 찾지 못한 영혼들이 작은 단서라도 얻어 들으려고 찾아든다 이렇게 찾아와 밤새 이야기하는 영혼들을, 살아있는 사람들은 목백일홍 이라고 말한다 백일홍 나무라고 말한다 배롱나무라고 말한다 그 곁에 있는 충혼묘지에도 백일기도하는 붉은 꽃이 있다 죽어서도 영혼을 찾지 못한 몸들이 있다 그리하여 여전히 순례를 멈출 수 없다
제주작가 72호(봄호)
# 종착역과 출발역
김도수 시인의 글을 읽으면
연어의 종착역이 보인다
언어의 종착역이 보인다
내가
연어의 종착역을 말하면
시인은
언어의 종착역을 말한다
언어와 연어가 만난다
나는 연어를 따라서
언어의 종착역으로 간다
나는 너무 멀리 돌아서
왔다 이제 다시
그 종착역에서 출발한다
# 대설주의보
어제 밤에 대설주의보처럼 꿈을 꾸었다
부처님과 예수님과 주치의 선생님께서
나에게 남은 생명이 5년이라고 말씀 하셨다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말씀 하셨다
5년의 시한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만 할까
꿈속에서 고민을 하는데 저절로 눈이 떠졌다
시계를 보니 이제 막 새해가 열리는 밤이었다
책상 위에는 어제 낮에 받아서 읽다가 잠든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가 놓여있다
다시 읽기 시작하니 섬진강이 보이고
진뫼마을이 보이고 반월산이 보이고
연어의 종착역이 보이고 징검다리가 보인다
어제 눈이 많이 와서 한라산을 넘지 못하고
이어도공화국에서 해를 넘기고 있는데
어둠 속으로 새해가 열리듯 방문이 열리더니
반월산에 누워 계신 부모님께서 들어 오신다
아직, 내가 등을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어야 할 흰 소는 보이지 않는다
# 연어의 종착역
고향집 바로 앞에
연어의 종착역 표지석이 있다
나는 연어가 되어
참으로 먼 길을 거슬러 돌아왔다
나도 이제는
붉은 알을 낳아야만 한다
# 언어의 종착역
언어의 종착역에는 어머니의 무덤 하나가 있다*
나를 만나기 전에 잃어버린 젖무덤 하나가 있다
* 나는 몸으로 기억한다. 나의 몸이 어머니를 기억한다. 어머니는 나의 하느님이다. 그 기억을 더듬어 다시 한 번 그 따뜻한 길을 여행한다. 그 행복과 평화의 길은 나의 길이고 내 아들의 길이고 내 어머니의 길이고 우리들 모두의 길이다. 그 숭고한 길의 힘으로 나는 오늘도 행복하게 살아간다.
나의 몸은 아직도 토성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토성(土星)을 진성(鎭星)이라 부른다. 토성은 목성에 이어 태양계에서 두 번째로 크며, 직경은 지구의 약 9.5배, 질량은 약 95배이다. 태양으로부터 14억k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약 9.7km/s의 속도로 공전하는데, 이는 지구 시간으로 대략 29.6년이나 걸린다.
나의 기억이 왜 토성에서부터 출발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나는 아직 모른다. 나는 다만, 어쩌면 나의 이름 때문에 기억이 재구성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날, 그러니까 그믐달도 없는 깜깜한 밤에 토성은 30년 만에 지구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 접근하였고 번쩍, 하는 불빛과 함께 우주비가 내렸다. 나는 그 5억 개가 넘는 우주의 빗방울 속에 있었다. 나는 무작정 토성에서 지구를 향해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지구에 도착하여 보니 어느 작은 시골이었다. 그믐달도 없는 깜깜한 밤에 보름달을 이고 가는 도붓장수 여인이 있었다. 커다란 미원박스 안에 바늘, 실, 양말, 동정, 고무줄, 비누… 많은 생활용품들이 담겨있고 그 박스 아래는 생활용품과 물물교환 한 쌀, 보리, 조, 수수, 콩 등이 담긴 자루가 있고 또한, 그 박스 위에도 비교적 가벼운 물건들과 함께 이미 팔려나간 물건들 대신 수숫대 빗자루며 계란 등과 함께 손때 묻은 되가 있었다. 이 모든 물건들을 아주 큰 보자기에 싸서 이고 가는 여인이 있었다. 집을 나설 때에는 빈 헝겊 자루들이 똬리 역할을 했지만, 그 접혀 있었던 자루들이 불룩하게 다 채워지고 네모난 박스 위에도 묘지처럼 볼록해서 보름달이 되어야만 집으로 돌아가는 여인 이었다.
그 여인의 몸은 흠뻑 젖어 있었고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지천에 피어있는 참꽃들만이 바람결에 맞추어 몸을 눕히고 있었다. 나는 다행히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를 적셨고 무사히 그녀의 몸과 마음속으로 침투할 수 있었다. 이것은 나의 운명이었고 축복이었다. 나는 그렇게 천만 다행으로 그녀를 만났고 그녀는 나의 어머니가 되어가기 시작하였다. 어찌하여 나는 그녀를 젖게 했을까? 왜 나는 하필 그런 여인의 몸속으로 황급히 뛰어 들어갔던 것일까? 나는 어찌하여 그렇게 그녀의 아들이 되었던 것일까?
# 마포대교
누군가는 저 다리를 건너
역사를 바꾸었고
누군가는 저 다리를 건너
도화낭자를 만났고
누군가는 저 다리를 건너가다
다 건너가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자꾸만
다리 난간에 있는
거울 속 사내를 들여다 본다
# 눈사람
나는 하늘에서 온 사람
나는 하늘로 돌아갈 사람
나는 이제 곧 강이 될 사람
나는 다시 바다가 될 사람
나는 아지랑이로 피어오를 사람
나는 또다시 구름으로 떠돌 사람
그래도 나는 영원히
그대 손길을 잊지 못하는 사람
# 수선화
꽃이 너무 많다
잔이 너무 많다
독이 너무 많다
독을 마시기에 딱 좋은 금잔옥대
벌써 비워져 있다
# 달과 소나무
심장내과 복도에는 어둠이 쌓여있다
나의 하느님이신 원장님께서 문을 열고 불을 켠다
잠시 후에 천사들이 들어오며 출근 체크를 한다
피를 뽑아 검사를 하는 동안 나는 세한도를 본다
늙은 한 그루는 소나무가 분명한데
젊은 세 그루는 소나무일까 잣나무일까
나무들보다 둥그런 문이 더 궁금하다
보름달 안에서 반달이 보인다
초승달과 그믐달도 보인다
그 문에서 나의 반월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대동맥판막 반월문에서 시계소리가 들린다
반월산에 나란히 누워계신 반달 두 개도 보인다
엎어놓은 반달의 잔디 위에도 눈이 쌓여 있으리라
아직은 나의 반달문이 잘 열리고 잘 닫히고 있으리라
금속으로 만든 반월 문짝이 빠지는 일도 있으리라
문짝이 칼이 되어 대동맥을 갈라버릴 수도 있으리라
문을 지나가는 피가 떡이 되어 핏줄을 막아버릴 수도 있으리라
혈전이 뇌로 가서 뇌졸중을 일으킬 수도 있으리라
비트코인처럼 빛나던 문이 악귀의 입처럼 변할 수도 있으리라
아, 나는 이제 심장에서 나가는 문이 가장 무섭다
아, 나는 이제 세상으로 나가는 달이 가장 무섭다
나는 나의 하느님에게 십계명을 받아들고 나온다
세한도 밖으로 폭설은 멈출 줄 모르는데
늙은 소나무 한 그루 아직은 잘 살아가고 있다
장무상망(長毋相忘), 나의 묽은 피로 붉은 낙관을 찍는다
제주작가 73호(여름호)
1
퐁낭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폭낭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팽나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당산나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신당나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서낭당나무라 말하는 사람도 있고
정자나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2
얼굴책에서 우연히 나무 한 그루 사진을 보았다
살아있는 낭쉐 한 마리 내 마음 속으로 들어온다
뿔로 하늘을 들어올리고 있다
쿵쿵쿵 지축을 흔들며 낭쉐 한 마리 걸어가고 있다
텅, 텅, 텅, 걸어가면서도 똥을 잘 싼다
똥덩이를 보니 ‘상가리 천년퐁낭’이라 쓰여있다
지식의 바다로 헤엄을 쳐서 들어간다
살아있는 낭쉐는 코끼리가 되고 하마가 되고
거대한 전갈이 되고 거대한 하늘소가 된다
코뿔소가 되고 사슴이 되고 노루가 되고 토끼가 되고
백록이 되고 꽃 모자를 쓴 설문대할망이 된다
나는 쇠기둥을 받치지 않은 낭쉐가 더 마음에 들지만
세월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
나는 이제
천 년을 넘게 살았다는 그 폭낭을 찾아가
간절한 마음으로 절을 올려야만 하겠다
속을 다 비우고 껍데기로 버티고 있을 나무 한 그루
뼈만 남아서 온 몸이 뼈가 된 나무 한 그루
나이테도 다 버리고 기억의 힘으로만 살아가는 나무 한 그루
넘어지고 얻어터지고 허리가 꺾여서도
끝끝내 포기할 수 없었을 생에 대한 믿음 한 그루
나는 그 꿈과 삶에 대한 예의를 찾아서 가리라
그 간절한 마음은 꿈속으로도 이어져
연꽃이 있는 꿈속으로 먼저 찾아간다
천년폭낭이 낳아 기른 상가리
이 폭낭 아래서 차씨, 주씨, 현씨 세 사람이 움막을 짓고
생활하기 시작하여 지금의 상가리로 발전하였다는 전설을 따라가니
올레에 조등이 걸려있는 상가에서 도감으로 앉아서
천 년 넘게 돔베고기를 썰고 계시는 할머니가 계신다
3
나무라고 해서 모두가 나무처럼 사는 것은 아니다
나무로 태어났지만 짐승처럼 살아가는 나무가 있다
거대한 곤충처럼 기어가는 나무가 있다
울퉁불퉁한 몸뚱이를 이끌고 천천히 하늘로 기어가는 거미가 있다
살아있는 낭쉐 한 마리 하늘로 올라가 하늘소가 되고 있다
다시 한 번 눈을 비비고 바라보니 진흙소 한 마리 숲으로 간다
바람소리 한 수레 싣고 허공 속으로 날아오르고 있다
상가리 천년폭낭을 보니 드디어 나무가 보인다
나와 무(無)가 함께 보인다
나보다 무(無)가 더 잘 보인다
4
길을 찾아보려고
홀로
밤새 길을 걸었다
아침에 집에 돌아와
휴대폰을 보니
카톡이 하나 와 있다
아, 오늘이
나의 생일이었구나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소중한 사람이 있었구나
5
며칠 전에 겨우 배웠다
천년폭낭 보고 배웠다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지금 처한 그 처지에서
최선을 다하여 살아라
바람 불면 바람을 안고
비가 오면 빗물에 젖고
눈이 오면 눈물을 닦고
봄이 오면 하늘을 보고
여름 오면 그늘을 주고
가을 오면 뿌리로 가고
겨울 오면 하늘로 가라
나도 이제 그렇게 산다
6
강산 시인의 꿈삶글을 쓴다
강산 시인의 꿈과 삶과 글을 쓴다
강산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든다
강산 시인의 세상 읽기 &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
를 다시 쓰기 시작한다
나는 참 아는 것이 없다
나는 참 세상을 모른다
나는 참 사람을 모른다
나는 참 나를 모른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처음부터 다시 세상을 읽는다
나는 세상을 잘 읽어서
아름다운 세상 하나 만들고 싶다
나는 나를 더 잘 읽어서
나의 세상 하나 꼭 만들고 싶다
이제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글을 쓴다
세상을 베끼고 세상을 배운다
사람을 베끼고 사람을 배운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먼저 집 정리를 하고 메모를 한다
아, 오늘은 식목일이자 한식날 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나무 심기를 좋아하고
찬 음식을 먹는 가난한 시인이었구나
7
제주도 어느 마을이나
폭낭이 많다
내가 사는 화순에도
폭낭들이 참 많다
여름이면
동네 사람들이
폭낭 아래 모여서 지낸다
자세히 보면
상처가 많은 나무들이 대부분이다
암덩이처럼 울퉁불퉁 하고
오래 전에 잘린 가지들은
속이 텅텅 비어 있다
그렇게 상처 많은 나무들이
새들을 품어 키우고
사람들도 그늘로 덮어주며
모두 모두 함께 잘 자란다
이어도공화국에도 그런 폭낭들이 많이 자라고 있다
8
며칠 전에 보고 온
천년폭낭이
자꾸만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천년폭낭 등에서 자라는
돌나물들이
자꾸만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천년폭낭 등에서 자라는
어린 생명들이
자꾸만 나에게 눈을 껌벅거린다
처음에 보고는
다른 나무가 곁에서 자라나서
함께 합쳐진 연리목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큰 바람에 쓰러질 때
엉겁결에 땅을 짚었던
왼손이었음을 알았다
하늘을 향해야 할 가지가
땅을 향하여
뿌리처럼 박혀 있는
그 나뭇가지가 자꾸만
내 눈에 밟힌다
쓰러진 몸으로도 잘 사는 폭낭 한 그루
큰 바람에 꺾이어 상체를 다 잃고도
다시 싹을 틔워 살아나
자꾸만 자꾸만 나를 부른다
사람들이 받쳐 준 쇠기둥 다 버리고
온전한 자신의 뼈로 지팡이 삼아
다시 새롭게 부활을 꿈꾸는 폭낭 한 그루
자꾸만 자꾸만 내 몸으로 들어온다
천 년을 넘게 살았다는 폭낭 한 그루
자꾸만 나에게 새로운 길을 알려준다
9
천년폭낭도 처음부터 천 년을 산 것은 아니다
콩이 두부가 된다는 것은
콩이 고기가 되는 것이다
콩이 두부가 된다는 것은
원이 네모가 되는 것이다
콩이 두부가 된다는 것은
딱딱함이 부드러워진다는 것이다
어릴 적 내 고향에는 밤마다 두부를 만들어 파는 집이 있었다 따뜻한 두부를 먹기 위해서는 저녁밥을 일찍 먹고 서둘러서 가야만 했다 커다란 솥에 미리 갈아놓은 콩물을 은근히 끓이며 저어주어야만 했다 어둠이 눌러 붙지 않게 하려면 끊임없이 저어주어야만 했다 보통 하루에 두 판 정도의 두부를 만들었고 명절에는 더 많이 만들어 팔곤 하였다 인기가 좋아서 늦게 가는 사람들은 두부는 사지 못하고 비지만 얻어올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 때 얻어먹은 순두부와 두부의 맛을 잊을 수 없다 두부뿐만 아니라 비지의 맛도 잊을 수가 없다
두부를 만든다
이제는 맷돌로 갈지 않고 모터로 콩을 간다
물을 부어가며 콩을 갈아 콩물을 만든다
이왕에 콩물이 있으니 콩국수도 만들어 먹으며 두부를 만든다
두부를 만드는 핵심 기술은 은근과 끈기다
은근한 불에 끈기 있게 저어주는 것이 핵심이다
우리들의 인생도 그렇다
인생이 눌러 붙지 않기 위해서는
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저어주어야만 한다
어떤 사람은 솥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콩물을 저어주고 있다
어떤 사람은 금방 지쳐서 방에 들어가 드러눕는다
어떤 사람은 곁에서 노래를 불러준다
어떤 사람은 국수를 끓이고 김치를 만든다
어떤 사람은 상을 차리고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콩이 콩물이 되고 콩물이 다시 엉겨 붙어 두부가 된다
딱딱한 것들은 부드러워지고
둥근 것들은 제 영혼을 갈아서 다시 네모로 부활한다
순두부로 만족하는 두부도 있지만
다시 물을 쪽 빼고 두부가 되고 싶은 콩들이 많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그렇게 모두가 둥그렇게 태어나서 네모로 간다
둥그런 하늘 아래서 둥그런 무덤을 만들고 떠난다
둥그런 무덤 속에는 언제나 두부처럼 네모난 관이 들어있다
(혹은 네모난 상자 안에 둥그런 항아리 속에서 잠든다)
제주작가 74호(가을호)
창세기 1장
태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도 없었고 땅도 없었고
하느님도 없었고 말씀도 없었다
태초라는 말도 없었다
빛도 없고 어둠도 없는 허공에
아무도 모르는 씨앗 하나 날아왔다
그 작은 씨앗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었다
처음은 그렇게 하나로 시작되었다
하나의 껍질을 벗으니 둘이 되었고
둘은 다시 하나가 되어 넷이 되었다
어느 맑은 날 문득 하늘이 생겼다
하늘은 텅 빈 없음이니 없음이
자꾸만 무엇인가를 낳기 시작했다
먼지를 낳고
바람을 낳고
구름을 낳고
어둠을 낳고
별과 달과 지구를 낳고
뜨거운 태양을 낳았다
하나가 둘이 되면서 빛과 어둠이 생겼고
둘이 넷이 되어 동서남북을 낳아 길렀다
그렇게 세상은 생겨나서 팔방으로 퍼졌다
하지만
처음의 세상은 너무나 뜨거웠다
너무 뜨거운 세상에
구름은 물이 되어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물과 흙은 생명을 낳았고
생명들은 물에서 흙으로
흙에서 허공으로 퍼졌다
세상에 태어난 것들은
따뜻함을 중심으로 모였다
손에 손을 잡고 돌기 시작했다
따뜻함은 가득한 사랑이니
사랑은 사랑을 낳아 길렀다
세상은 그렇게 사랑이 되었다
사랑은 시간을 만들고
시간은 인간을 낳았다
인간은 공간을 만들고
공간은 신들을 낳았다
공간이 만든 신들은 죽고
인간이 만든 돈이 빛났다
신들의 시대는 지나가고
인간의 시대도 지나가고
화폐의 시대도 지나가고
지구는 병이 깊이 들었다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은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나거나
메타버스를 타고 가상공간으로
서둘러서 떠나가고 있다
인간이 만든 신은 죽었고
스스로 신에 등극한 돈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신과 사람과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옹달샘의 숲이 되어 숲으로 살아간다
창세기 2장
하나님께서 가장 잘 하신 것은
일곱째 날에 안식을 하신 일이다
일곱째 날에 반성을 하신 일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못 하신 것은
여자를 흙으로 만들지 않고
남자의 갈비뼈로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잘 하신 것은
일주일을 만들어 주신 일이고
하나님께서 못 하신 것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일이다
하나님은 일주일을 만드셨고
달님은 한 달을 만드셨고
해님은 일 년을 만드셨고
해와 달의 사랑이 하루를 만들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제
일주일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날마다 쉬지 못하고 밤까지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도 많다
2조1교대를 하는 사람들도 많고
3조2교대를 하는 사람들도 많고
4조3교대를 하는 사람들도 많고
5조3교대를 하는 사람들도 많고
날마다 놀고먹는 사람들도 많다
하나님께서 불공평하게 만든 남자와 여자는 모두 떠나고
스스로 이 세상에 공평하게 태어난 여자와 남자들이 산다
이런 세상에서 나는 날마다 나를 창조한다
나는 하나님이 아니므로
이어도공화국 건설을 위하여 베이스캠프를 먼저 만든다
창세기 3장
뱀은 손과 발이 없어도
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
뱀은 귓구멍이 없어도
듣지 못하는 것이 없다
뱀은 눈꺼풀이 없어도
보지 못하는 것이 없다
뱀은 수 백 개의 갈비뼈로
온 몸과 온 마음으로
땅의 영혼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삼보일배 같은 간절한 마음으로
오체투지 같은 절실한 마음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동안거에 들어가 용맹정진하는 마음으로
큰 수술을 받은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소신공양까지 불사하는 뱀들의 마음으로
가장 낮은 자세로
기도하고 수행하는 뱀들의 마음으로
자신의 목숨을 연명할 만큼만 먹고
먼저 공격하는 법이 없는 평화주의자의 마음으로
낮은 포복으로 엎드려 기어 다니다가
길쭉한 소주 됫병 속에서 비로소
몸 속 사리 같은, 마음 속 모든 독을 토해내고
비로소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서서 보는
뱀술 같은 뱀의 운명이여, 또 다른 나의 운명이여
아, 내가 새롭게 만든 에덴동산, 서천꽃밭에
구렁이 한 마리, 나의 발가락 앞으로 지나간다
창세기 4장
나는 가인의 후예일까 아벨의 후예일까
나는 셋의 후예일까 아담의 후예일까
나는 이브의 후예일까 뱀의 후예일까
세상의 시작은 하나에서 시작하였으니
나는 그 하나님의 자식이 분명하다
태초의 처음은 없음에서 출발하였으니
나는 그 없음의 자식임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만물은 모두가 형제자매가 분명하다 너도 나도 모두가 형제자매가 분명하다 뱀도 그렇고 곰과 호랑이도 그렇고 여우와 늑대도 그렇다 고양이와 돼지도 그렇고 토끼와 사슴과 새들도 모두가 다 한 식구가 분명하다 원숭이와 코끼리와 낙타와 사자도 한 식구가 분명하다 나무늘보와 개미핥기도 우리들의 한 식구가 분명하다 소와 말과 개도 그렇고,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을 너무 몰랐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고 모자란 것이 없다
하나님은 깡패나라의 두목이 아니다
하나님은 푼돈이나 뜯어먹는 양아치가 아니다
하나님은 오직 자식들을 사랑할 뿐
그 어떤 재물이나 예배도 바라지 않는다
하나님은 어떠한 뇌물도 바라지 않는데
인간들은 자꾸만 십일조 뇌물을 바치려고 한다
인간들은 자꾸만 보험용 뇌물을 상납하려고 한다
형제자매들끼리 서로 도와가며 서로 나누기를 바라는데
인간들은 자꾸만 아부하려고, 하늘에 뇌물을 상납하려고
형제자매들의 재물을 더 많이 빼앗으려고 한다
아무리 보아도 하늘에는
지상의 재물을 쌓아 둘 창고가 없다
내가 사는 에덴동산에는 이제
하느님도 살고 단군할아버지도 살고 설문대할망도 함께 살아간다
부처님도 살고 공자님도 살고 예수님도 함께 모여서 정답게 살아간다
성경책도 읽고 팔만대장경도 읽고 사서삼경도 읽으며 살아간다
날마다 주기도문을 외우고 반야심경을 외우며 살아간다
가끔은 페이스북 속의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며 살아간다
무화과나무 아래로 모세의 지팡이 같은 뱀이 한 마리 지나간다
나는 모세도 아니고 모세의 지팡이도 없어서
뱀을 집어 들지 못한다
무화과나무 잎이 넓은 그림자를 벗으며 잠시 흔들린다
무화과나무 열매 안쪽에서 꽃이 환하게 피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