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나를 보낸다 46
수국과 산수국의 계절이 온다
어머니께서는 파마를 하시고
아버지께서는 술 한 잔 걸치고
꽃 브로치까지 하고 오신다
나비들과 함께 반월산을 내려오신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수국을 심는다
불두화 같은 파마머리 보려고 심는다
붓펜이 된 가지로 초대장을 쓴다 지금
편지를 보내면 장마와 함께 오실 것이다
하늘에서도 어머니는 너무 바빠서
물의 왕국 징검다리 건너
눈물의 여왕으로 오실 것이다
그때도 아마 장사 나가지 못하는 날
파마를 하시고 비닐 커버를 한 채
마르는 동안 잠깐 들르실 수 있을 것이다
머리카락이 엉덩이까지 길었다는 처녀시절
막내딸이 맏며느리가 되면서 시작했다는 파마
얻은 삼씨 한 되를 팔면서 시작했다는 도붓장사
어머니는 평생 부처님 파마머리로
늦은 밤 보름달을 이고 징검다리 건너오시고
나 또한 평생 지게에 어둠을 지고 건너다녔지
어머니와 나는 늦은 밤에도 상을 펼쳤지
실, 바늘, 비누, 양말, 동정, 고무줄, 비누곽..,
생필품과 바꿔 오신 조, 콩, 수수, 보리쌀..,
상에 펼쳐 놓고 좋은 것만 골라 담았지
어머니는 오일마다 시장에 나가
곡식을 팔고 다시 생필품을 사서 오셨지
가끔은 붕어빵도 몇 개 사 오셔서 참 좋았지
비가 오는 날도 어머니는 참 바쁘셨지
이고 다니는 물건들 젖어서 장사는 못하셨지
하지만 몸이 젖으면서도 일은 멈추지 않으셨지
그래도 가끔은 파전이며 배추전을 부쳐주셨지
나는 오늘 어머니가 보고싶어 수국을 심는다
붓으로 자란 이 수국 가지에 파마머리 피리라
장마가 시작되면 어머니는 머리하러 오시리라
장마 끝나면 어머니는 하늘로 돌아 가시리라
돌아 가시기 전에 나는 이제
파전도 부치고 배추전도 부쳐드리리라
하늘의 식구들에게 가져다 줄
붕어빵도 한 봉지, 팥죽도 한 그릇 싸서 드리리라
제주도 팽나무와
워싱턴 야자수가
나란히 서 있다
가지 많은 나무가 허리도 펴지 못하고 그늘을 가꾼다
가지 하나 없는 나무가 하늘 높이 탑만 쌓아 올린다
벌레들에게도 젖을 물리며 숨소리를 어루만지고 있다
우리들의 하늘을 들쑤시며 함부로 붓질을 해대고 있다
야자수 쪽에서 붉은 해가 떠오른다
키 큰 야자수 그림자가 팽나무 가슴을 관통한다
팽나무 쪽으로 붉은 해가 기울어진다
넓은 팽나무 그림자가 홀쭉한 야자수를 안아준다
워싱턴 야자수와
제주도 팽나무가
나란히 눕는다
폭낭과 워싱턴야자수가
나란히 서 있다
붉은 해가 솟는다
워싱턴야자수 그림자가
폭낭 가슴을 관통한다
붉은 해가 기운다
가슴이 넓은 나무가
홀쭉한 나무를 안아준다
* 4월 1일부터 제주4․3평화공원 문주에 전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나는 시화는 짧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 눈에 들어오는 이미지 하나로 평화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으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완성될지 아직은 모른다. 우선 메모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4․3이라 말하지 않고 3․1절 발포사건”이라고 말한다. 우리들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외치던 3․1정신을 향해 발포한 미군정, 그리고 무자년 겨울의 초토화 작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승리를 위해서는 그런 적군까지 용서하고 안아줄 수 있는 가슴 넓은 민족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진정한 예수님의 사랑이고 부처님의 자비가 아니겠는가?
나는 언제 어디서 왔을까?
나는 지금 어디로 가는가?
똑, 똑, 똑, 제습기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내가 숨 쉬는 공기에 이렇게 많은 물방울이 숨어 있었구나. 내가 살아있는 목숨 안에 이렇게 많은 눈물방울이 숨어 있었구나. 밖에는 이미 6월 장마가 시작되었고 안에서도 역시 장마가 시작되었구나.
6월 장마에 돌도 큰다, 라는 속담이 있다. 6월 장마에 특히, 수국과 산수국 그리고 대나무들이 가장 크게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하고 있다. 그들 중에서 나는 오늘 산수국을 오래도록 본다. 산수국을 보며 아버지를 생각한다. 나는 언제 어디에서 왔을까, 깊이 생각한다. 아버지의 아버지를 생각하고 더 먼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를 생각한다. 그렇게 저 먼 곳으로 다시 찾아가 나의 뿌리를 생각한다.
나의 아버지는 1931년 3월 26일에 이 세상에 태어나셨다. 나는 그때부터 아버지 몸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나는 아마 1965년 6월 장마가 시작되고, 산수국과 수국이 한창 피어나던 이 무렵에 아버지 몸 밖으로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나의 모든 전생을 한 번쯤 더 되풀이하여 생각했을 것이다. 물에서 살았던 시절부터 물 밖으로 기어 나왔던 경험까지, 그중에서 많은 것들은 생략하고 꼭 필요한 정거장들만을 거쳐서 돌아왔을 것이다. 아가미 시절과 허파 시절을 짧은 10개월 동안 다시 한번 속성으로 살아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1966년 어느 봄날에 힘차게 울면서 이 세상으로 나왔을 것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어도공화국에는 아버지 같은 산수국이 피어나고 어머니 같은 수국이 피어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어도공화국에는 아들 같은 큰유리새도 함께 살고 있다. 나는 이제 마지막으로 나의 꿈과 나의 삶과 나의 글들을 점검하고 확정하여, 꼭 필요한 것들만 이 세상에 남기고 빈 몸으로 저 먼 곳으로 다시 한번 떠나야만 하리라.
* 제주의 산수국과 큰유리새
산수국(Hydrangea serrata for. acuminata)은 제주도 한라산 정상까지 자라는 낙엽성 작은키나무이다. 습기가 많은 계곡 사면이나 바위틈에서도 잘 자란다. 꽃은 붉은색에서 파란색까지 다양한 색깔로 피며 수정이 이뤄진 뒤에는 꽃의 색깔이 변한다. 이런 특성은 ‘변하기 쉬운 마음’이라는 꽃말에서도 나타난다.
제주에서는 변덕스러운 도깨비의 마음과 닮았다고 해서 ‘도채비고장’이라고도 부른다. 도채비고장은 ‘도깨비꽃’이라는 뜻의 제주어이다. 제주에서는 장마가 시작되는 6월 말부터 8월까지 핀다. 산수국은 꽃잎이 없이 암술과 수술로 이뤄져 있다. 꽃잎처럼 보이는 것은 곤충을 불러들이기 위해 만든 무성꽃이다. 산수국은 꽃이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많이 이용한다. 뿌리는 한방에서 ‘토상산’이라 부르며 피부병 치료에 이용한다. 수국 종류의 잎은 단맛과 박하향을 갖고 있어 차로 이용하기도 한다.
큰유리새(Cyanoptila cyanomelana)는 참새목 솔딱새과의 여름철새이다. 몸의 크기는 17cm이고 수컷과 암컷은 몸 빛깔이 다르다. 수컷은 이마부터 등, 날개, 꼬리까지 푸른색을 띠며, 목과 뺨, 가슴은 검은색으로 배의 흰색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암컷은 몸 윗면이 갈색을 띤다. 번식기에 수컷은 아름다운 소리로 지저귀며 바위틈이나 계곡의 흙벽에 이끼로 둥지를 짓는다. 주로 계곡 주변 울창한 숲에서 번식하며 중산간지역의 숲, 곶자왈 등에서 관찰된다. 푸른색 몸 빛깔을 보는 것만으로도 여름이 시원해 질 것 같은 느낌을 준다.
* 산수국의 다양한 모습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