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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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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Feb 19. 2024

산상(山上)

윤동주 시인과 함께, 너에게 나를 보낸다 20




산상(山上)



거리가 바둑판처럼 보이고,

강(江) 물이 배암의 새끼처럼 기는

산(山) 위에까지 왔다.

아직쯤은 사람들이

바둑돌처럼 벌여 있으리라.


한나절의 태양(太陽)

함석지붕에만 비치고,

굼벵이 걸음을 하던 기차(汽車)

정거장(停車場)에 섰다가 검은 내를 토(吐)하고

또, 걸음발을 탄다.


텐트 같은 하늘이 무너져

이 거리를 덮을까 궁금하면서

좀 더 높은 데로 올라가고 싶다.

 

 _ (1936.5. 윤동주 20세) 



윤동주 시인은 죽은 다음에 비로소 태어난 시인이다. 윤동주 시인은 사후에 친구들과 지인들과 가족들에 의하여 시인으로 부활한 시인이다. 좋은 시인은 시만 잘 쓴다고 좋은 시인이 될 수 없다. 좋은 시인은 시를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잘 살아야만 한다. 시인의 바른 길을 찾아서 올바르게 잘 살아야만 한다.


산을 일종의 해탈을 상징한다. 산을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일체의 번뇌에서 해탈하고픈 내면 충동을 의미한다. 산은 그만큼 높은 곳에 존재한다. 화자와 산 사이에는 쾌 먼 거리가 놓여 있다. 초월과 달관을 위한 몸부림이 있다. 심리적으로 추구해 들어가는 보다 높은 곳, 고통의 세계 건너편에는 해탈의 피안이 있다. 발은 비록 현실을 딛고 섰을지라도 머리는 늘 이상을 꿈꾼다. 생활은 늘 이율배반을 반복한다. 그 시대를 휩쓴 정신적인 기갈이 지향하는 곳은 마치 노아의 방주와 같은 구원의 산상이었을 법하다. 화자인 나의 쌓인 욕구불만과 좌절이 안개처럼 깔려있다. 하늘은 고작 텐트 같은 하늘이고 그 하늘마저 무너질까 저어하는 마음이다. 그리하여 발돋움하되, 좀 더 높은 데로 올라가고 싶어 하는 것이리라. 


1936년 5월 작품으로 광명학원 중학부로 편입한 후 쓴 작품이다. 산 위에서 바라본 도시 풍경을 평온히 묘사한 작품이다.


윤동주 시인은 1936년 4월 6일 자로 용정의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으로 편입하게 된다. 작품이 쓰여진 시기를 고려했을 때, 이 작품은 광명학원으로 편입한 후에 창작한 최초의 작품으로 보인다.


시인의 비슷한 시기인 1936년 5월에 쓴 다른 작품으로 <오후의 구장>이라는 시가 있다.


'함석'은 표면에 아연을 도금한 얇은 철판으로 지붕, 양동이, 대야 등을 만드는 데 쓰이는 재료다.

'내'는 냄새를 뜻한다.

'걸음발을 탄다'라는 말은 보통 아이가 걸음을 익혀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하는 모양을 말한다.


* 원문표기

- '새끼처럼' -> '색기처럼'

- '산 위에까지 왔다' -> '山읗에 까지 왓다'

- '벌여' -> '별여'

- '지붕에만' -> '집웅에만'

- '비치고' -> '빛이고'

- '굼벵이' -> '굼벙이'

- '걸음을 하던' -> '거르을 하든'

- '섰다가' -> '섯다가'

- '걸음발을' -> '거름발을'

- '무너져' -> '문허저'  


한 시인의 시적 세계는 유년시절의 경험과 청소년 시절의 경험이 많은 영향을 끼친다. 윤동주 시인의 인격 형성과 시적 세계의 구축은 만주와 디아스포라와 명동 마을과 김약연의 독립정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고토회복과 이상촌 건설과 인재교육을 위하여 만주로 건너갔던 선각자들의 후손, 민족운동과 기독교 민족교육의 본거지가 되어가는 명동촌, 이토 히로부미를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한 안중근이 천주고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부당한 뒤 김약연의 도움으로 몰래 권총으로 사격 연습을 한 곳도 명동촌의 뒷산이었다고 한다. 조연현 선생님의 <해방의 등불 된 '간도의 대통령'>이란 글에서도 잘 증언하고 있다. 그리하여 장로가 된 김약연 선생님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일찍부터 시작된다. 특히 <무오독립선언서>에서 밝혔듯이 일제에게 독립을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육탄혈전'으로 독립 '전쟁'을 해서 무력으로 일제를 몰아내야 한다는 더욱 적극적인 의지를 피력했기 때문에 일제의 입장에서는 무장투쟁의 본거지를 그냥 두고만 볼 수 없었다.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은 북간도 민족운동의 근거지로 자리 잡았던 명동학교를 불태우고, 무장투쟁을 주장해 온 교장 김약연을 체포한다. 김약연은 1920년 쉰둘의 나이에 체포되어 2년 동안 옥살이를 한다. 1923년 출옥해 폐허에 임시 건물로 지어진 명동학교를 유지했지만 이듬해 흉년으로 운영난에 시달린다. 1925년 용정의 은진중학교와 통합하여 명동중학교는 문을 닫는다. 윤동주 시인은 1925년 4월 그대로 유지되었던 명동소학교에 입학한다.


1929년 예순한 살의 나이로 김약연은 평양신학교에 다니며 목사 안수를 받는다. 목사이면서도 사회주의자 이동휘와 손을 잡았으며 서일 등 대종교 지도자들과도 협력했다. 중국인들이 그를 '간도의 한인 대통령'이라고 부를 만치 포용력 있는 지도자였다. 1930년 예순둘의 김약연은 명동교회 목사로 돌아온다. 당시 열세 살이던 윤동주와 송몽규는 이때부터 규암 김약연에게 <맹자>와 <성경> 등을 배우고 1931년 3월에 명동소학교를 졸업한다. 1932년부터 1934년까지 규암 김약연은 은진중학교에서 성경과 한문을 가르친다. 그리고 1938년 2월에 용정의 은진중학교와 명신여고의 이사장으로 취임한다. 규암은 이미 존경받는 목사이며 민족지도자였지만 말이 아니라 삶 자체로 모범을 보였다. 교장이면서도 천 평쯤 되는 밭농사를 직접 지었고 거름을 등에 지고 다니면서 황무지를 개척했다. 가을에는 농군들과 함께 밤새워 타작을 하는 등  제자들을 가르치는 모습이 마치 공자가 제자들에게 도를 행하는 것과 흡사했다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많다. 1942년 10월 29일 용정시 자택에서 돌아가셨는데 "내 모든 행동이 곧 나의 유언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일흔넷의 일기로 별세하셨다. 

         


https://youtu.be/IfOxDXRO6AM?si=gciUcxLxyVO00cf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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